유배지에서 학문의 꽃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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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11월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 도착했어요. 정약용이 머무는 곳은 비좁고 초라했지만, 정약용은 마음을 가다듬고 독서와 학문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였어요. 누구 하나 따뜻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고, 주위에는 그를 경계하여 감시하는 차가운 눈만이 있었어요.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
그러다 정약용의 명성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와 스승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슨 가르침을 주겠소.”
“그래도 부디 저희들을 제자로 거두어 주십시오.”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부탁했어요. 이 같은 일이 계속 되자 언제 귀양살이에서 풀려날지 모르니 백성들을 위해서 글이라도 가르치기로 다짐하였어요. 정약용은 백성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도록 하였어요.
강진 생활 8년 째 제자가 마련해 준 조그만 집으로 머물 곳을 옮기게 되었어요. 그 집이 다산이라는 산 밑에 있었는데 산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지었어요.
정약용은 곧바로 책을 쓰는 일에 힘을 쏟았어요. 붓과 벼루만을 곁에 두고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았어요. 어깨가 마비되고 시력이 나빠져 안경에만 의지하게 될 정도였어요.
유배 생활은 고통스럽고도 비참하기 짝이 없었어요. 하지만 19년의 강진 유배 생활은 정약용에게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접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 더욱 힘쓸 수 있었던 값진 기간이었어요.
다산 초당(전남 강진군)
문화재청
정약용은 긴 유배 기간을 잘 활용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많은 책을 썼어요. 그 중 지방 수령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도리를 담은 『목민심서』는 그의 대표적 저서에요.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후세에 길이 남길 위대한 학문을 완성한 것이에요.
정약용의 3대 저서 : 경제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정약용은 뛰어난 과학적 재능으로 배다리를 설계하고 수원 화성을 지었어요. 또 직접 수령이 되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도 하였어요. 정약용은 백성에 대한 사랑을 학문뿐만 아니라 실천으로 옮긴 큰 학자였어요.
만약 자신을 든든히 지원해 준 정조가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정약용의 실학사상과 재능이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