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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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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전태일
어린 시절, 어려웠던 나라 살림
가족이 같이 살 집 한 칸도 없던 시절
어린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전태일
행복했던 청옥고등공민학교의 생활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의 힘든 삶을 보다
노동자를 위한 ‘바보회’를 조직하다
좌절 속에 새로운 결심을 하다
희망이 보이는 듯하더니, 다시 어두워지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 운동의 불꽃이 된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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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전태일
전태일 동상(서울 종로구)“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부근의 평화시장 앞에서 한 청년이 큰소리로 외치며 뛰어나왔어요.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몸은 불길에 휩싸였지요. 이 청년이 바로 전태일이에요. 그는 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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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07-24
9
어린 시절, 어려웠던 나라 살림
전태일은 1948년 9월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1948년 이전에는 방직공장 노동자였으나, 이후에는 재봉틀을 이용해 일종의 개인 사업을 했어요. 하지만 넉넉지 못한 살림에 늘 가족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지요. 당시에는 전태일의 가족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렸어요. 왜 그랬을까요?전태일이 젖먹이 어린 시절이던 때 6·25 전쟁으로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국토는 황폐해져 먹고 살길이 막막한 경우가 많았어요. 1962년 국가에서는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5년 단위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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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07-24
8
가족이 같이 살 집 한 칸도 없던 시절
전태일은 여섯 살까지 부산에서 살았어요. 이 시기 아버지 전상수는 미군 부대에 근무하며 미군 양복을 수선하고, 헌 군복과 모자를 옷으로 만들어 피난민에게 판매하였어요. 살림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힘들어졌어요. 그런데다 염색 공장에 맡겼던 옷감이 장마로 엉망이 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요.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전태일의 가족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서울에서도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잠잘 집도 구하지 못해 서울역 근처 염천교 다리 밑에서 노숙을 해야만 했어요.아버지는 술로 보내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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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07-24
7
어린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전태일
어머니마저 일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자 전태일은 가족을 위해 나서야 했어요. 그때 전태일의 나이 12살이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 그 부담감은 너무도 컸어요.전태일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어요. 신문을 팔고 구두도 닦았어요. 몸이 정말 힘들었어요. 학교를 계속 다닐 형편이 안 되어 결국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둬야 했어요. 방세도 내지 못한 전태일의 가족은 쫓겨나 천막집이 늘어선 개천가에서 잠을 자야 했지요.아버지는 여전히 술로 보내는 날이 많았고,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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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07-24
6
행복했던 청옥고등공민학교의 생활
서울 생활이 어려웠던 전태일의 가족은 다시 대구로 내려와 살게 되었어요. 마음을 고쳐먹은 아버지는 집에 재봉틀 한 대를 들여놓고 열심히 일을 했고, 전태일도 아버지의 일을 도왔어요.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지요. 꿈에 그리던 학교도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전태일은 밤에 문을 여는 야간학교인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날들을 보냈어요.낮에는 일하고 밤에 나가 공부하니 몸은 힘들었지만, 전태일은 이때를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빛나고 즐거웠던 날들로 기억하고 있어요. 친구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체육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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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07-24
5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의 힘든 삶을 보다
전태일의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고, 그는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었어요. 당시 청계천 주변에는 약 800여 개의 작은 공장이 있었어요.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옷을 만들었지요. 재단사, 미싱사를 비롯해 시다(일하는 사람의 옆에서 그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시다는 대부분 12~15살 어린 소녀들로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올라온 경우가 많았어요. 어린 시다들은 다림질을 하고, 실밥 뜯는 일을 하며 미싱사나 재단사를 도왔지요.시다부터 시작한 전태일은 얼마 후 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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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07-24
4
노동자를 위한 ‘바보회’를 조직하다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점차 억울하다는 생각이 커져갔어요. 마침 그 무렵 노동자를 위한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듣게 되었어요. 그 법에 따르면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만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예요.그런데 현실은 하루에 14시간, 1주일에 98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었지요. 이를 어긴다고 해서 처벌받는 공장 주인도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지요.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어요. 이후 근로기준법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며 공부를 했어요.1969년 6월 말 즈음, 전태일은 자신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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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07-24
3
좌절 속에 새로운 결심을 하다
바보회가 결성될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전태일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쳤어요. 그는 평화시장에서 위험한 인물로 소문이 나 공장에서 쫓겨났고, 다시 취직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지요.가족의 생계를 제대로 책임지지도 못하고 빚만 점점 늘어나니 전태일의 마음은 무거웠어요.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어요. 바보회도 잘 운영되지는 않았지만 그럴수록 있는 힘을 다했어요.그는 1969년 8~9월쯤 노동자들의 근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지를 돌리고, 그것을 모아 서울시청 근로 감독관을 찾아갔어요.하지만 근로 감독관의 반응은 시큰둥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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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07-24
2
희망이 보이는 듯하더니, 다시 어두워지다
전태일은 교회 수도원 공사장 일을 그만둔 후 다시 평화시장 재단사로 취직했어요. 그에 대한 소문이 가라앉은 덕분이었지요. 다시 뜻을 같이 할 재단사들을 모아 ‘삼동 친목회’를 결성했어요.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시장 세 건물의 재단사들의 모임이었지요.그들은 비참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기로 했어요. 시청과 노동청을 찾아다니고, 방송국에도 가보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지 않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관심을 보이는 신문사 기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지요. 전태일과 동료들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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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07-24
1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 운동의 불꽃이 된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주변은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어요. 경찰들이 곳곳을 지키고 서 있었지요.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위를 준비하며 상황을 살폈어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건물 밖으로 나와 현수막을 펼쳐들었어요.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어요.현수막을 빼앗으려는 경찰과 노동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때였어요. 전태일이 사람들 앞으로 나와 가슴에 품고 있던 근로기준법이 적힌 책자를 한 손에 들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어요.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전태일근로기준법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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