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고려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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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구려가 나주를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왕건이에요.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송악(현재 개성)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웠어요. 왕건의 아버지는 궁예가 강원도 일대를 차지할 무렵 궁예의 편이 되었고, 왕건도 20살의 젊은 나이에 궁예의 신하가 되었어요. 이후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곳곳에서 공을 세웠어요. 특히 903년에는 바닷길을 통해 전라도 남쪽 지역을 공격하여 그곳을 후고구려의 영토로 삼았어요.
그런데 후고구려의 국내 정치는 안정적이지 못했어요. 궁예가 스스로 미륵부처라고 주장하면서 마음대로 횡포를 저질렀어요. 죄 없는 사람들까지 함부로 죽이자 신하들의 마음이 궁예에게서 떠나가기 시작했죠. 그리하여 신하들은 궁예를 쫓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세웠어요. 918년 왕건은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하고 송악(개성)으로 도읍을 옮겼어요.
왕건에게 쫓겨나는 궁예
고려를 세운 왕건은 신라와 친하게 지내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신라를 괴롭히던 후백제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지요. 대표적인 싸움이 공산(지금의 대구) 전투에요. 두 나라가 이 전투를 하게 된 이유는 견훤이 신라를 계속 공격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신라의 경애왕이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보다 먼저 견훤의 군대가 신라의 수도인 금성(지금의 경주)까지 공격한 것이죠.
포석정과 경애왕
927년 견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금성으로 쳐들어갔어요. 당시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기느라 견훤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도 몰랐다고 해요. 견훤은 신라왕을 죽이고 다른 왕을 세웠어요.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에요.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도우러 갔다가 금성에서 철수하는 견훤의 군대와 공산에서 마주하게 되었어요. 이때 왕건은 후백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공산 전투에서 크게 지고 말았어요.
3년 뒤인 930년에 왕건과 견훤은 고창(지금의 안동)에서 다시 맞붙었어요. 이때는 고창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 덕분에 왕건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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