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무관 학교

신흥 강습소가 세워지다

컨텐츠 정보

본문

1911년 6월 10일, 신민회 회원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드디어 신흥 강습소가 세워졌어요. ‘신흥’은 신민회의 ‘신(新)’자와 다시 나라를 구하는 싸움이라는 의미의 ‘흥(興)’자를 합친 것이에요. 독립군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인데, 왜 무관 학교라는 이름대신 강습소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중국 사람들의 눈초리와 일본의 감시 때문이었어요.


중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남의 나라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에 와서 군사 훈련을 하고 군대를 운영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독립군의 활동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늘 중국에 우리 독립군을 탄압할 것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군대를 보내 우리 독립군을 공격하기까지 했거든요.

비록 빈 집 옥수수 창고를 빌려 세워진 신흥 강습소였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열기는 정말 뜨거웠지요. 수업은 사격, 전투 훈련, 전술학, 무기학 등 군사적인 과목 외에도 역사, 지리, 산수, 화학, 도덕, 독서, 한문, 체조, 중국어 등 정말 다양했어요. 독립군을 길러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민족의식을 기르는 수업도 중요시했어요.


신흥 강습소의 군사 훈련은 실제 전투처럼 치열하게 이루어졌다고 해요. 중국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산속 공터에서 학생들은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이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김창환, 이세영, 이장녕 등이었는데, 이들은 옛 대한제국의 장교 출신들이었어요. 교관의 지휘 아래 학생들은 적(일본군)에 맞서 공격 전술, 방어 전술을 훈련하였어요. 마치 대한 제국 군대의 군사 훈련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지요.



c888d33515da063a792bccac114bb583_1746482582_6716.JPG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신흥 강습소 학생들




1912년 7월 삼원보의 신민회 회원들은 합니하에 땅을 사고 새 건물을 지은 후 이곳으로 신흥 강습소를 옮겼어요. 합니하의 신흥 강습소는 교실을 비롯해 교무실, 내무반, 식당 등 훨씬 더 넓었고, 군사 훈련에도 더 적합한 곳이었어요.


이렇게 훈련받고 졸업한 학생은 1911년 12월 제1회 졸업생 40여 명이 배출된 이후 1918년까지 약 8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어요. 한편 신흥 강습소는 1913년에 신흥 중학교로 이름을 변경했어요.

신흥 강습소에서 배움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1912∼1913년 무렵에 만주 지역에 지독한 흉년이 들었어요.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 힘들 정도였으니 학교에서의 군사 훈련도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이회영을 비롯해 신흥 강습소의 설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은 물론 신흥 강습소의 선생님들까지 서간도를 비롯해 여러 지역을 다니며 도움을 청했어요. 제자들의 배고프지 않도록 손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먹을 것을 구해 왔지요. 신흥 강습소 선생님들은 구해온 음식을 제자들에게 나눠주면서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독립을 향한 굳은 의지를 다지며 함께 울었다고 해요.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 / 1 페이지
RSS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