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가 세운 나라 밖 독립운동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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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어요. 이후 일본은 하나둘 다른 조약을 맺으며 대한제국의 정치까지 간섭을 하며 국권을 모두 빼앗고자 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상황이었어요. 이러한 때에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여러 지식인들이 비밀리에 단체를 만들었어요. 바로 신민회라고 불리는 단체였지요.
신민회는 오산학교, 대성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사업을 했고, 또 서적을 출판하는 태극 서관, 도자기와 그릇을 만드는 자기 회사도 운영하였어요. 이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신민회는 장차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직접 총을 들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위해 독립운동 기지와 군대를 만들 계획을 세웠어요. 그리고 일본의 손길이 쉽게 닿지 않는 나라 밖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라의 국권을 빼앗긴 넉 달 후인 1910년 12월 서울 남대문로 상동 교회 지하실에 양기탁, 이회영, 이동녕, 이동휘 등 신민회의 임원들이 모였다고 해요. 바로 나라 밖에 독립군을 운영할 기지를 만들고 병사들을 길러낼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서였지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립군을 길러낼 무관 학교를 세워야 합니다.”
“제가 그동안 독립군을 길러낼 장소로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녀보았습니다. 서간도 지역의 삼원보가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됩니다.”
이 자리에서 신민회 회원들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항일 무장 투쟁으로 정하고 나라 밖 독립운동 기지를 서간도에 두기로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자금이었어요. 학교를 세우고 많은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이들을 먹이고 쉬고 훈련할 곳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엄청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었어요. 이때 이회영이 나섰어요.
“제가 우리 형제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모두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많으니 제 결심에 함께 할 것입니다.”
이회영은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이항복의 후손으로 그 집안은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어요. 그를 비롯해 여섯 형제는 서울과 양주, 파주, 개성, 충주 등에 넓은 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어요. 집으로 돌아간 이회영은 다섯 형제들에게 연락을 했고, 얼마 후 가족 회의가 열렸어요.
이회영 가족 회의 기록화(이회영 기념관)
“형님들! 그리고 아우들아!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부유한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산을 모두 팔아 이 돈으로 만주에 가서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길러내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회영의 제안에 다른 다섯 형제 모두 흔쾌히 따르기로 했어요. 여섯 형제는 서둘러 땅을 팔아 약 40만원을 모았어요. 당시 쌀 한 섬(144kg)이 3원 정도 했으니까 현재 화폐 가치로 약 600억원이 넘는 큰 돈이었죠. 훗날 이 돈은 신흥 강습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무장독립전쟁기지의 이동 경로
1910년 12월 30일, 이회영 등 여섯 형제의 가족 일행 60여 명은 여러 대의 마차로 나누어 타고 압록강을 건넜어요. 그리고 만주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의 추가가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어요.
이 무렵 같은 신민회 회원으로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함께 뜻을 모았던 이동녕의 가족과 친척들, 경상북도 안동의 이름난 유학자였던 이상룡의 가족과 친척들,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협동중학교의 교감 선생님이었던 김동삼의 가족과 친척들, 개성의 이건영 형제들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삼원보에 모여들었어요. 이처럼 전통있는 명문가 출신의 100여 가구가 가족들을 이끌고 삼원보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