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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32년 고향 명동촌을 떠나 용정(룽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은진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폭넓게 활동했어요. 교내 잡지를 발간하느라 밤새 원고지와 씨름하는가 하면 축구와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어요.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한 끝에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하기도 했어요.
은진중학교는 캐나다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였어요. 그래서 중국 관리나 일본 경찰들도 함부로 학교 안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 행사 때나 학급회의 때 마음껏 애국가를 부를 수 있었어요. 이러한 것들이 윤동주의 애국심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지요.
1934년 12월 중순 서울에서 전보가 배달되어 왔어요. 윤동주가 받아서 보니 서울 동아일보사에서 송몽규에게 신춘문예(신문사에서 봄에 문학 작품을 받아서 뛰어난 작품들에 상을 주는 행사) 당선 소식을 전하는 전보였어요. 윤동주는 진심으로 송몽규를 축하해 주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척 부럽기도 했어요. 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춘문예에 당선되길 바라거든요. 자신도 틈틈이 시를 쓰고 있던 윤동주는 잠을 뒤척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자신도 앞으로 좋은 작품을 쓰기로 했어요.
송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은 윤동주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어요. 그날부터 윤동주는 더욱 정성스레 글을 썼고, 또 자신이 쓴 글 밑에 글을 쓴 날짜를 적어 놓았어요.
은진중학교 4학년이 된 윤동주는 단짝 송몽규와 헤어지게 되었어요. 윤동주는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기로 했어요. 반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던 송몽규는 중국에 있는 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중국 난징으로 떠났어요. 얼마 후 윤동주는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 시험을 봐서 합격했어요.
고향에서 먼 평양에서의 학교 생활은 낯설고 힘들었지만 윤동주는 열심히 공부하고 또 시를 썼어요. 당시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이름난 시인 정지용이었어요. 윤동주는 정지용 시집을 늘 손에 끼고 읽고 또 읽었어요. 평소에 시를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정성스레 공책에 옮겨 적었어요.
숭실중학교 시절 윤동주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7개월 만에 끝이 났어요. 왜냐하면 당시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했는데, 숭실중학교 학생들이 이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죠. 신사는 일본의 여러 신을 모아 놓은 사당이었는데, 여기에 가서 절하고 기도하는 것을 강요했어요. 그러나 기독교 계열의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우리는 우상숭배(하느님이 아닌 존재나 사물을 하느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것)를 할 수 없다.’라며 시위를 벌였어요.
시위로 학교는 무기한 쉬게 되었고, 결국 윤동주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숭실중학교를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어요.
얼마 후 독립군이 되기 위해 중국의 군관학교에 다니고 있던 송몽규도 용정으로 돌아왔어요. 일본의 항의로 중국의 군관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에요. 송몽규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어요.
그사이 윤동주는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공부와 시 짓는 일에 열중했어요. 몇 달 만에 석방된 송몽규는 곧장 윤동주에게 찾아왔고, 밤새 둘은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송몽규는 윤동주가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시를 보여 달라고 했어요. 송몽규는 윤동주의 시를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절로 감탄했어요. 그리고는 윤동주에게 말했어요.
“동주야! 나는 네 시가 참 좋다. 좋아. 군더더기가 없이 정말 깔끔해.”
“네가 중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나는 시 짓는 일에 몰두하긴 했지만, 막상 몽규 네가 그렇게 칭찬해 주니 쑥스러운 걸.”
“동주야!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아픔과 독립 의지를 시로 남겨 봐. 그건 직접 총 들고 싸우는 독립운동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