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밑거름이 된 서원
컨텐츠 정보
- 2 조회
- 목록
본문
명종 때는 훈구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어요. 훈구 세력은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이후 권력을 확대해 나갔던 사람들이었죠. 이들은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늘렸어요. 이 과정에서 적잖은 비리와 부정이 일어나기도 하였지요.
이와 달리 사림 세력은 지방에서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썼던 학자들로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정치를 추구하였지요. 사림은 적극적인 언론 활동으로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였지요. 그러다 사림은 정치적 반대 세력인 훈구 세력에게 몰려 큰 화를 입게 되지요. 이 사건을 사화라고 해요.
사림은 중앙 정치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물러난 뒤에도 곳곳에 서원과 향약을 세워 향촌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갔어요. 향약은 고을의 자치규약이에요. 유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고을의 주민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정해 놓은 것이죠.
사림들은 지방에서 인재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중앙 정치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며 관직에 나아갈 기회를 기다렸어요. 사림이 서원의 기능을 확대시켜 나가자 지방의 양반 자제들은 대부분 서원에 입학했지요.
다행히 서원이 교육 기관이라 훈구 세력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어요. 조정에서도 적극적으로 서원 설립을 지원해 주었어요. 그 결과 명종 말기에는 많은 서원들이 세워졌지요.
향교는 나라에서 선정한 유학자만을 제사 지냈어요. 이와 달리 서원은 저마다 이름난 유학자를 선택해 그의 학문을 계승하며 제사를 지냈지요. 특히 매우 유명한 유학자는 여러 서원에서 그의 학문을 본받으려 했어요. 이를테면 이황은 40여 곳, 이이는 20여 곳의 서원에서 각각 제사를 지내며 받들었답니다.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도산 서원(경북 안동시)
문화재청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옥산 서원(경북 경주시)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