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의 고단한 삶을 안아준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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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면서 전쟁은 곧 끝날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요. 국군과 유엔군은 빠르게 후퇴를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갔어요. 피난민들은 기차를 타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발로 몇 달을 걸어서 겨우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부산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어요. 그러자 정부는 급하게 피난민이 모여 살 수 있는 수용소를 마련하였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어요.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피난민들은 직접 판잣집을 지어 생활했어요.
판잣집은 주로 미군 부대에서 나온 박스나 판자 부스러기를 주워 만들었어요. 바닥은 가마니를 깔아 겨우 땅의 냉기만 가렸지요. 겨울이면 판잣집의 벽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힘겹게 싸워야만 했어요.
기차로 피난 가는 사람들과 걸어서 피난을 가는 사람들
국가기록원, 전쟁기념관
피난민을 괴롭힌 것은 추위만이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부산에는 먹을 수 있는 물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특히 산비탈에 만들어진 판잣집에 수도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어요. 사람들은 산 밑의 수도꼭지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어요. 그리고 물동이에 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산 위까지 날랐어요.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산을 오르고 내려도 몇 동이밖에 나르지 못했어요.
피난민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었어요. 많은 피난민들은 부산항의 부두 노동자가 되었어요. 부산항에는 원조 물자와 무역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이 많았거든요.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일을 할 수 있었고,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일자리는 많아 구하기도 쉬웠어요.
그리고 역이나 터미널, 시장에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지게꾼이 되어 하루하루 힘든 생계를 이어갔어요. 여자들은 주로 시장에서 일을 하였어요. 피난민이나 노동자, 지게꾼들을 상대로 꿀꿀이죽이나 국수를 팔기도 했고, 노점상이 되어 원조 물자를 팔기도 했어요.
피난민들은 매일매일 낯선 환경과 힘든 노동에 지쳐갔지만 부산에 정착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어요. 돈을 벌고 자식들을 키울 수만 있다면 허름한 판잣집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이때는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요.
피난민들의 삶
전쟁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