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유적

6·25 전쟁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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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만들어지고, 한반도에 서로 다른 이념을 따르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어요. 1948년 8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고, 다음달인 9월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세워졌어요. 남한과 북한은 서로 통일을 주장하였어요. 그리고 38선을 넘나들며 개성, 옹진반도 등에서 서로 작은 규모의 충돌을 계속했어요.


1949년에 남한에 있던 미군이 모두 철수하자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은밀하게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본격적으로 남침을 시작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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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지나는 북한군 전차

전쟁기념관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온 북한군에 국군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계속 밀려났어요. 전쟁이 나고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한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야 했어요. 긴급하게 파병된 미군도 북한군을 막지 못했어요. 심지어 미군을 이끌던 사단장이 북한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기도 했어요.


전쟁이 나고 한 달 만에 남한 지역 대부분을 북한군이 차지하였어요.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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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을 방어하는 미군(왼쪽)과 학도의용군(오른쪽)

전쟁기념관,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북한군은 대구, 포항 등 방어선 전 지역에서 총공격을 했어요.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약 2개월 간 남한과 북한은 모든 힘을 다해 맞서 싸웠어요. 북한군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면 국군과 유엔군이 이를 공격해 되찾기를 반복했어요.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인천에서 함정 261척과 7만여 명이 참여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어요. 북한군의 허리를 끊어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어요.

수많은 함정에서 함포를 쏘고, 상륙정에 병사들을 태워 육지로 상륙시켰죠.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은 월미도였어요. 2천여 명의 북한군이 강하게 저항했지만 거센 공격으로 인천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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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상륙하는 해병대

전쟁기념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국군과 유엔군은 바로 서울을 되찾기 위한 작전을 펼쳤어요. 그리고 9월 28일,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 만에 드디어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서울을 되찾은 연합군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였어요. 그리고 20여 일 만에 평양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일부 부대는 압록강에 도착하여 곧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한층 커져 갔어요.

유엔군이 평양에 들어갈 10월 무렵이었어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며 모든 부대에게 북진을 명령했어요. 이때 북한의 다급한 요청으로 중국군 38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어요. 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고, 밤에 몰래 이동하는 중국군을 알 수가 없었어요.


1950년 12월,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모든 전선에서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유엔군은 비행기와 탱크, 대포 등 중국군에 비해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10배가 넘는 수의 중국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개마고원의 겨울은 너무 추웠고 영하 30도의 추위에 얼어 죽는 유엔군도 생겨났어요. 뿐만 아니라 장비도 얼어붙어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어요. 혹독한 추위와 수많은 중국군에 포위된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항을 통해 간신히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어요.

중국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어요. 중국군이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오자 크게 놀란 서울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다시 피난을 나섰어요. 급기야 중국군의 계속된 공격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은 다시 총공세를 펼쳐 1951년 3월 다시 서울을 되찾고, 38선 이북으로 북한군과 중국군을 밀어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상황이 지속되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자 세계 여러 나라는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어요. 그래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한반도를 되돌리려는 휴전 회담이 1951년 6월부터 시작되었어요.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38선 주변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매일매일 벌어졌어요. 산 하나를 놓고 뺏고 뺏기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 것이죠. 그러나 미국이나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보다는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을 멈추는 것에만 관심이 컸어요. 고지쟁탈전이 계속되고, 큰 소득도 없이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이 희생되는 가운데 휴전 회담은 계속되었어요. 국민들은 매일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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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과 휴전 문서에 서명을 하는 대표들

국가기록원




오랜 시간 끝에 개성 근처에 있던 판문점에서 남한의 대표 없이 미국과 중국, 북한만이 참석한 가운데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어요. 1953년 7월 27일 전쟁은 끝나지 않은, 다만 멈춰있는 상태로 끝이 나고 만 것이에요.

6·25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어요. 주택과 학교, 공공시설, 도로, 철도, 교량 등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어요. 남측 군인 78만 명, 북측 군인 203만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전투 중에 실종된 군인들도 많았어요.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인명피해도 매우 컸어요.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와 남편을 잃은 미망인 수십만 명이 생겨났어요. 이산가족은 무려 1천만 명에 달했고요.


전쟁이 멈추고 남한과 북한 모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어요. 1953년에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해 미국에서 보내주는 원조 물자 없이는 살아남기가 힘들었지요. 전쟁은 지독한 가난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만 남기고 끝나고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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