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의 역사가 담긴 실록을 온전히 보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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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을 편찬하는 과정만큼 보관하는 방법도 중요했어요. 조선 건국 이후 실록은 춘추관에 한 부를 보관하고, 충주·성주·전주 등 교통의 요지였던 주요 도시의 사고에 한 부씩 모두 4부를 보관했어요.


그런데 임진왜란 때 실록은 전주 사고에 보관했던 것만 남고 모두 불타 버렸어요. 전주 사고의 실록은 난리가 나자 백성들이 미리 깊은 산속으로 옮겨서 무사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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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오대산사고(강원 평창군)

문화재청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전주 사고의 실록을 원본으로 삼아 실록을 다시 인쇄했어요. 전쟁 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역사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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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태백산사고(경북 봉화군)

문화재청




실록의 보관 장소도 주요 도시에서 깊은 산속으로 옮겼어요. 조선 후기에 실록은 춘추관에 한 부, 그리고 정족산·적상산·태백산·오대산 사고에 한 부씩 5부를 보관했어요. 이렇게 깊은 산 속 여러 곳에 사고를 둔 이유는 불이 나거나 임진왜란 때처럼 외적이 쳐들어 와 실록이 모두 없어질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어요.

사고에는 실록뿐만 아니라 왕실의 족보, 중요한 역사서, 경서 등도 함께 보관했어요. 그러니까 사고는 국가의 중요한 서적 보관소였던 셈이지요.


사관들은 3년에 한 번 정도 사고 건물과 실록을 관리했어요. 사고에 찾아가 실록의 수를 점검하고, 상자에서 꺼내 햇볕에 말리고 먼지를 털어 주었어요. 좀이 스는 것을 막아 오래 보관하려는 노력이었지요. 이를 포쇄라고 하는데, 사관들의 중요한 업무였어요.


사고의 문은 정기 점검을 할 때, 새로운 실록을 봉안할 때, 나라에서 정책 결정을 위해 옛일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때와 같이 특별한 경우에만 열 수 있었어요. 이때는 중앙의 사관이 참여해야 했지요. 사고 문을 열어 본 후에는 반드시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열어 봤는지 기록지를 만들어 붙였어요. 이처럼 사고는 엄격하게 관리되었답니다.


다시 만들어진 실록은 병자호란이나 6·25전쟁 같은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지금까지 전해졌어요. 실록은 1968년부터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워낙 양이 방대하다 보니 1993년에야 작업이 끝났어요. 지금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인터넷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실록을 읽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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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있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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