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 새로운 도시 화성을 건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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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즉위한지 13년이 되는 해였어요. 그동안 백성을 위해 펼친 여러 개혁 정치로 나라 안팎은 점차 안정되었어요. 백성들도 정조를 성군이라 부를 정도였지요.
그러나 정작 정조는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어요.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 때문이었어요. 정조는 효심이 매우 깊었어요.
“과인이 처음으로 아버지 묘소를 보았을 때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쏟아져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였소. 어찌 그리 작고 형편없이 만들었단 말이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풍수 명당인 수원으로 옮기기로 하였어요. 그러려면 그곳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어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어요.
“나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 당장 수원부 관아 뒤편 화산으로 옮기도록 하라. 대신 수원부를 팔달산 동쪽 넓은 들판으로 옮겨 백성들의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
마침내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가 옮겨졌고, 정조는 새로운 묘소의 이름을 ‘현륭원’이라 하였어요.
“아바마마! 드디어 편안한 곳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비참하게 잃은 후 평생 가슴에 품어야 했던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어요.
수원화성 팔달문(경기 수원시)
정조는 수원을 한양 다음으로 큰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어요. 수원으로 이주하는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고, 수원의 도시 이름도 지위를 높여 화성으로 바꾸었어요.
신도시 수원 화성은 정확한 설계도와 거중기 같은 편리한 기구 덕분에 빠른 속도로 건설되었어요. 일하는 사람들도 일한 만큼 돈을 받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지요. 그 결과 10년 걸릴 것을 예상했던 화성 건설은 1796년, 2년 6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지요. 공사를 하던 1795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화성으로 대대적인 행차를 하기도 했어요.
정조는 완성된 화성을 보며 다시 한번 자신의 꿈을 다져보았어요.
화성에서 새로운 개혁 정치를 하리라.
내 꿈을 펼치리라.
정조는 효심이 깊고 학식이 뛰어나고 다재다능한 임금이었어요. 무엇보다 백성을 제 몸처럼 아끼고 백성을 위한 개혁 정치를 펼쳤지요. 이러한 정조가 있었기에 조선은 다시 한번 중흥기를 누릴 수 있었어요. 만약 정조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이후 조선은 어떻게 변하였을까요?
환어행렬도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하는 능행은 조상들에게 예를 갖추는 동시에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의 국가적 큰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