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궁지의 역사
컨텐츠 정보
- 1 조회
- 목록
본문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어요. 그러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몽골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왔어요.
고려는 몽골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기보다는 맞서 싸울 것을 결정했어요. 그리고 수도를 옮길 것을 검토했어요. 그래서 개경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넓은 농토가 있으며, 세금 운송에 편리한 곳을 찾았어요.
더구나 해전에 약한 몽골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이었어요. 그곳이 강화도였어요. 당시 최씨 무신 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우는 군사를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강화도 천도는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궁궐과 관청 등 대부분의 시설은 천도 후 백성들이 힘들게 공사해 완성했어요.
고려 시대 강화도
전쟁 중에 급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궁궐의 규모는 개경 궁궐에 비해 훨씬 작았어요. 그래도 강화도에 지어진 새 궁궐은 개경의 궁궐을 본떠 지어졌어요.
강화도의 궁궐 뒷산을 송악(개경의 수도 북쪽에 있는 산)이라고 부르고, 정문을 승평문(개경의 궁궐 정문)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이렇게 당시 강화도는 또 하나의 작은 개경이 되었어요. 강화도의 고려 궁궐은 몽골과의 화친 후 왕이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몽골의 요구에 따라 대부분 파괴되었어요.
한편 조선 시대에 이곳에 행궁(왕이 원래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마무르는 궁궐)과 관청(유수부), 백성들 집들이 들어서면서 고려궁지는 더욱 축소되었어요. 따라서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궁궐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요.
고려궁지 뒤쪽에는 외규장각이 있는데, 이 건물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이에요. 특히 왕이 직접 보는 의궤를 보관하던 곳으로 유명하지요.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였고, 최고급 종이를 사용하였어요. 또한 최고급 물감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지요. 이처럼 의궤에 사용된 재료를 통해 당시 왕실의 위엄을 엿볼 수 있지요.
왕이 보는 어람용 의궤의 표지와 안에 사용된 종이(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문화유산채널, 국립중앙박물관
한편,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의 눈을 사로잡은 것도 이 어람용 의궤들이에요. 병인양요는 1866년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된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무력 침범한 사건이에요.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병사들은 백성을 약탈하고, 조선의 왕실 도서관 겸 창고였던 외규장각과 그 안에 있던 5,000여 권의 책을 불태웠어요. 또한 의궤를 비롯한 340여 개의 왕실 문서와 은괴 19상자는 훔쳐 갔지요.
강화도는 고려궁지 외에도 볼거리가 많아요. 고려궁지로 가는 길에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은 용흥궁이에요. 용흥궁은 조선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곳이에요.
강화도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리던 강화유수가 1853년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어요.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어 소박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요.
용흥궁 안에는 철종이 머물던 곳이라는 것이 기록된 비석과 비각이 있어요. 용흥궁 위쪽 언덕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자리 잡았어요. 이 성당은 겉모습은 한국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배치와 내부 구조는 서양 건축 양식이 반영되어 있어요. 한국의 건축 양식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면 고려궁지에 있는 여러 건물들을 살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