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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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은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발표했어요. 이에 따라 1919년 1월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어요. 월슨의 14개조 원칙은 각 민족의 일은 자기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로 알려져, 일제에 맞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지요. 그러던 중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는 한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2·8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어요. 국내에서도 일찍부터 만세 운동을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로 종교계 지도자들과 학생들이었지요. 그들은 고종 장례식 이틀 전인 3월 1일에 만세 시위를 벌일 준비하고 있었어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거든요.
1919년 2월 27일,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2만여 장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어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음식점인 태화관에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 삼창을 한 뒤, 경찰에 끌려갔지요.
탑골 공원에서는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200여 명의 학생과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하지만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들 중 한명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어요. 낭독이 끝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만세 삼창을 한 뒤 거리로 나와 행진을 하며 만세를 불렀지요. 밤까지 만세 시위는 이어졌어요.
서울 외에도 북부 지방에 있는 평양, 의주, 원산 등 6개 도시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어요. 3월 5일은 서울에서 또 한 번 큰 만세 시위가 벌어졌지요. 만세 시위는 점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어요.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 만세 운동을 벌였어요. 상인들은 상점 문을 열지 않고,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노동자들도 동맹 파업을 벌이기도 했어요. 농촌에서는 장날이 되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어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고,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그뿐 아니에요. 미국의 필라델피아. 중국의 룽징,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등 해외에서도 우리 교포들이 만세 운동을 벌였지요. 3월에 시작된 만세 운동은 5월까지 이어졌어요.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깜짝 놀란 조선 총독부는 총과 칼을 들이대며 무력으로 탄압했어요. 그럼에도 시위는 점점 더 번져 나갔어요.
독립선언서를 통해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선언하자, 정부를 만들기 위한 시도도 이뤄졌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지도부이자 자주국가의 정부인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3·1 운동이 한창이던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3·1 운동은 끝내 막을 내리고 말았어요. 하지만 3·1 운동은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참여하여 우리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위대한 독립운동이었어요.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은 3·1 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했어요. 그래서 나라에서는 3·1 운동의 그날을 3·1절이라는 국경일로 정했습니다.
지금부터 3·1 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며 그날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