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유적

국채 보상 운동의 중심에 선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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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중심의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된 진골목




진골목은 ‘긴 골목’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예요. 개항기에는 진골목 주변으로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어요.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진골목 주변에 살던 부녀자들은 패물폐지부인회를 만들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어요. 패물폐지부인회를 시작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30여 개의 국채 보상 운동단체가 전국에서 만들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 2천만 중 여자가 1천만입니다.”


“1천만 중에 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반은 넘을 것이오.”

“그렇소. 우리 모두가 반지를 팔아 의연금으로 낸다면 많은 국채를 직접 여인의 손으로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녀자들은 먼저 갖고 있던 비녀와 반지 등 패물을 의연금으로 기부했어요. 그것도 부족해 장사를 해서 번 돈이나 바느질을 해서 모은 돈, 식사량을 반으로 줄여 모은 돈으로 의연금을 마련했어요. 양반집 부녀자는 물론 신여성, 상인, 기생, 삯바느질 여성 등 지위와 상관없이 많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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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소에 의연금을 내는 국민들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대구 관기(관청에 속한 기생) 출신의 ‘앵무’(본명 염농산)였어요. 앵무는 의연금 100원을 내며 말했어요.


“의연금을 내는 것은 국민의 의무요. 내가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더 낼 수가 없으니 누구든 몇 천원을 의연하면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 내겠소.”


당시 앵무가 낸 100원은 매우 큰돈이었어요. 금액도 금액이지만 여성의 사회생활이 금기시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에게 더 많은 의연금을 내라고 당차게 주장하는 앵무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어요. 앵무에게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앞을 다퉈 의연금을 냈어요. 앵무의 소식을 전해들은 진주와 평양의 관기들도 단체를 만들어 운동에 함께 참여하였어요.


국채 보상 운동은 여성들이 자신의 뜻으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최초의 여성운동이라 평가를 받고 있어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당시에 여성이 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어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여성들의 의로운 마음은 일제 강점기에 다양하게 펼쳐진 여성 독립운동의 토대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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