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병자호란

근왕군의 승리, 광교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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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청군에 포위당해 고립되었을 때 지방군과 의병, 승병이 근왕군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어요. 근왕군은 ‘왕을 구하기 위한 군대’란 뜻이에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에 맞서 청군은 기병을 이용해 하나씩 격파하는 작전을 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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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근왕군과 청군의 전투


하지만 김준용 장군이 이끌었던 전라도 근왕군은 달랐어요. 북방에서 근무했던 김준용 장군은 여진족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부족한 병력과 화력을 보완하기 위해 김준용은 2천여 명의 근왕군을 광교산 기슭 높은 곳에 네모난 진을 만들고 전투를 준비했어요. 근왕군이 광교산에 자리를 잡자 청군은 홍타이지의 동생과 매형(양구리)이 이끄는 3,500여 명의 정예병을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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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준포와 조총

국립중앙박물관




청군이 조선군의 조총을 막기 위해 방패를 세우고, 높은 곳의 조선군 진영을 향해 포와 활을 쏘며 일제히 공격해 왔어요. 김준용 장군은 검을 빼 들고 군사들을 독려하며 조총과 활로 청군을 공격했어요.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조선군의 진영이 무너지지 않자 청군은 다른 방향으로 돌아 높은 곳에서 조선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언덕 위에 깃발을 든 적장이 보였어요.


“말 타고 깃발 잡은 자를 쏘아라!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적들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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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전투




조선군은 조총을 일제히 쏘아 적장을 쓰러뜨렸어요. 이 공격으로 적장 양구리와 부하 장수 여럿이 목숨을 잃었어요. 우두머리를 잃은 청군은 광교산에서 급히 물러났어요. 전라도 근왕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탄약과 화약이 모두 떨어져 남한산성으로 더 진격하지 못했어요.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승전은 많지 않았어요. 그러나 홍타이지가 아꼈던 장수를 꺾은 광교산 전투는 조선군의 힘을 보여준 전투였어요. 하지만 승전은 계속되지 못했고, 결국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말았어요.

김준용의 광교산 전투와 같이 근왕군이 좀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병자호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빠져나와 좀 더 멀리 피신했다면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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