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병자호란

병자호란, 청의 신하 나라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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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더욱 강해졌어요. 명과의 전쟁에서 계속 이기고 있었지요. 나라 이름도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국이 되었어요. 그리고 조선에 형제의 맹약을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했어요. 명을 황제국으로 받들던 조선으로서는 들어주기 힘든 요구였어요.

신하들은 군사를 일으켜 청을 공격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끝내, 조선이 요구를 받아주지 않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청은 정묘호란이 발생한 지 약 10년 만인 1636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에요.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겨울이 되고 압록강이 얼자 청군은 기병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해 왔어요. 이전과 달리 청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왔어요.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아들로 조선에 좀 더 강경하게 대응하였어요. 조선을 점령해 인조에게 직접 항복을 받고, 명을 공격하기 전에 배후를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지요.


청의 침입을 예상한 조선도 국경 지역 산성을 중심으로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청의 선봉 부대는 산성을 점령하지 않고, 바로 지나쳐 한양으로 진격했어요. 압록강을 건넌 지 엿새 만에 한양에 도착할 만큼 빨랐지요. 청군의 빠른 진격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어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청군은 곧바로 산성을 포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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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경기문화재연구원




남한산성은 높은 산 위에 만들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유리하고, 안쪽으로 넓은 분지가 있어 많은 사람이 머물 수 있는 큰 산성이었어요. 하지만 포위된 상태로 많은 사람이 오랜 기간을 버티기는 어려웠어요. 식량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군사와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했어요.

왕이 포위된 상태에서도 조선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계속했어요. 하지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올라온 구원군이 청군에 패하자 항복하자는 사람이 늘어났어요.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잘못된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지켜 보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겠다는 것은 개울에 빠져 죽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신하들과 항복하더라도 나라를 보전하자는 신하들의 논쟁이 계속되었어요. 청군은 남한산성보다 높은 곳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안으로 포격을 가했어요. 그 와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결국 인조는 47일 간의 항전을 끝내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까지 가서 청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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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포와 서울 삼전도비

실학박물관, 송파구청




두 달 정도의 짧은 전쟁이었으나 항복의 조건은 가혹했어요. 조선은 청의 신하 나라가 되었고, 수많은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어요. 인조 이후 임금이 된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을 준비했어요. 그러나 청은 명을 물리치고 끝내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되었어요. 조선이 병자호란의 원한을 풀 수 있는 길도 멀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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