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받는 평안도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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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가 살았던 평안도 지역은 청과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어 군사적,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에요. 이 지역은 국방비도 많이 들어가고, 조선을 찾은 청의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지요. 그래서 평안도는 한성으로 세금을 보내지 않고 예산을 독자적으로 쓸 수 있어 나름 재정도 넉넉했어요. 또한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업과 수공업이 발달했고, 특히 청과의 무역을 통해 상업도 발달했어요.
그러나 평안도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외적(거란, 몽골, 여진)의 침입이 잦았던 변방지역이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농업이 한반도 남쪽 지역에 비해 크게 발달하지 않았어요. 이 때문에 양반 가문이나 관리들이 평안도 지역으로 이주해 살려고 하지 않았어요. 당시 사람들은 평안도 지역을 귀양을 간 죄인과 그의 가족들이나 사는 곳으로 생각했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이렇게 말했어요.
“평안도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지낸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 … 서울 사람은 평안도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하려 하지 않는다. 평안도에는 이름난 양반 가문이 없고, 양반 가문은 또한 가서 살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평안도 출신이란 이유로 과거 시험에 합격해도 중요한 관직에 오르는 것은 매우 어려웠어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평안도 사람들은 조선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았던 거예요. 어려서부터 유학과 병서를 공부한 홍경래도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떨어지면서 평안도 출신이 겪는 차별을 직접 느꼈어요.
평안도 사람들도 탐관오리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어요. 조정에서 임명되어 온 높은 지위의 탐관오리들은 특히 평안도의 부유한 상인들을 노렸어요.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관청의 하급 관직을 파는 방법을 이용했어요. 상인들이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팔았지요. 또한 관청의 창고가 비면 하급 관리가 된 상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겨 이를 채우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