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은 어떤 모습의 수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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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자신의 고향인 개경을 수도로 삼아 고려를 세웠어요. 개경은 고려의 중심지로 당시에는 개경, 송도, 송경 등으로 불렸지요. 현재 개성에는 수도를 방어하던 외성(나성)을 비롯해 내성, 황성, 궁성 등 네 개의 성터와 만월대로 불리는 고려의 왕궁 유적이 남아있어요.
개경은 고구려 평양성과 같이 평지와 산을 연결하여 성을 쌓았어요. 제일 먼저 쌓은 성은 궁성과 황성이었어요. 궁성과 황성 안에는 임금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의 거처와 신하들이 모여 나랏일을 의논하던 정전을 만들었어요.
개경 왕궁 복원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송악산 아래 만든 궁궐은 정전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높은 언덕 위에 축대를 쌓아 만들었어요. 축대를 이용해 땅의 모양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궁궐을 더 웅장하고 위엄 있게 보이도록 신경썼어요. 이것은 조선 시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을 평지에 만든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죠.
고려가 세워지고 100년 가까이 번성하던 개경이 한 순간에 불타버리는 일이 벌어졌어요. 고려의 북쪽에서 힘을 키운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것이에요. 세 차례의 침략 중 2차 전쟁 때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하였고, 물러가면서 궁궐과 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어요.
거란군을 물리친 고려 조정은 불타 없어진 궁궐과 민가를 다시 짓고 개경을 다시 정비하였어요. 그리고 개경의 방어를 위해 약 24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20여 년 동안 외성(나성)을 쌓았어요.
개경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성은 길이가 약 23km 정도로 매우 길어 방어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이 잦아질 무렵 외성과 궁성을 연결하여 내성을 쌓았어요.
내성의 남대문에서 황성의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의 좌우에는 시전(상점)이 늘어서 있었어요. 시전 주변으로 많은 백성들이 모여 살았어요.
조선 시대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 중 송도전경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