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함께 발굴한 개성 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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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문화재청
만월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있었던 옛 궁궐터를 말해요. 고려 말 홍건적이 침략해 와 개경을 점령하였는데, 그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최근까지 폐허로 방치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고려 궁궐터의 중심인 만월대에 2007년 남북 역사학자들이 모였어요. 이후 남북의 공동 발굴로 수백 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고려 왕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발굴은 조사구역을 구분하기 위한 측량으로 시작되었어요. 발굴단은 바둑판 모양으로 줄을 설치해 조심스럽게 발굴을 했어요. 흙을 1m 정도 걷어내자 궁궐 지붕에 있었던 기와 조각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어요. 많은 기와 조각 중에 발굴단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어요. 불교가 탄생한 고대 인도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였죠.
①연화문 수막새, ②범자문 수막새, ③귀면문 수막새, ④귀목문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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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국교로 믿었던 고려는 개경뿐만 아니라 전국에 많은 사찰을 만들었어요. 왕궁도 불교와 관련된 문양을 이용해 꾸몄어요. 처음에는 연꽃무늬를 많이 사용했는데, 만월대 발굴을 통해 왕궁에서 고대 인도어를 무늬로 한 기와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가장 많이 출토된 기와는 귀목문 수막새였어요. 귀목문 수막새와 귀면문 수막새를 이용해 재앙이나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궁궐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어요. 화려했던 고려 왕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청자기와도 출토되었어요.
청자기와는 일반 기와와는 달리 청자로 만들었어요. 일반 기와보다 만들기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들어 평민들의 집에서는 사용을 못했어요. 주로 왕궁이나 절처럼 중요한 건물에서 사용했어요.
궁 후원에 연못을 팠다. 거기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양이정이라 했는데, 양이정에 청자를 덮었다.
옛 역사책에는 고려 왕궁에 청자기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만월대 발굴을 통해 이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했어요.
전남 강진 출토 청자기와(국립중앙박물관)
2015년 남북 공동발굴이 끝나갈 무렵 작은 유물 하나에 발굴단은 환호성을 외쳤어요. 흙을 모아 체질을 하다 손톱 크기의 아주 작은 금속활자 한 개가 나왔거든요.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에요. 『직지심체요절』이란 책을 통해 이 사실을 증명했지만 활자 대부분은 없어지고 단 2점만이 남아 있어요. 그나마 출토된 곳이 명확하지 않아 그 가치가 떨어졌죠. 발굴지가 확실한 금속활자가 발견되면서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어요.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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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발굴로 1점의 금속활자를 발견한 이후 북한 역사학자들이 추가 발굴을 통해 만월대에서 5점의 금속활자를 더 찾아내 지금은 모두 8점의 금속활자를 갖게 되었어요.
발굴단은 출토된 많은 기와 조각과 함께 주춧돌, 축대를 통해 사라진 고려 왕궁 건물들의 위치와 모양을 확인했어요. 뿐만 아니라 불교문화를 담은 기와와 청자기와를 통해 궁궐을 어떻게 장식했는지도 알 수 있었죠. 남북공동발굴은 사라진 옛 고려 왕궁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