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개조의 개혁안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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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는 또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도록 28개조의 개혁안도 올렸어요. 이를 시무 28조라고 해요. 시무란 지금 당장 해결해야할 일이란 뜻이에요. 오늘날에는 28개조 개혁안 중 22개조만 전하고 있어요.
시무 28조는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조된 개혁안이었지요.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를 보고 무척 기뻐하며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하나하나 시행해 나갔지요.
최승로는 왕이 광종처럼 너무 강한 힘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왕과 신하가 조화로워야 나라가 안정된다고 했어요. 무엇보다 연등회, 팔관회 등 큰 불교 행사를 줄여야 한다고 했고요. 이러한 행사를 치르느라 백성들은 동원되어 갖가지 일을 해야 했고,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지요. 또 승려들이 함부로 궁궐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절도 허락 없이 짓지 못하게 했어요.
왕은 지방 세력들이 마음대로 세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협조하도록 관리를 보내 다스리게 했어요. 왕을 대신해 관리들이 백성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였죠. 또 유교를 강조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도록 했어요.
개혁안을 올리는 최승로
성종은 최승로의 도움을 받으며, 유교 정치의 기틀을 다잡았어요. 덕분에 나라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안정되어 갔지요. 성종은 최승로를 가까이 두고 무척 아꼈어요. 높은 관직도 내렸어요. 그때 최승로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지요.
“전하, 신 이제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무슨 소리요? 내 곁에서 나를 더 도와주시오. 관직을 내놓다니 안될 일이오.”
성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몇 년 뒤 최승로는 세상을 떠났어요. 아끼던 신하를 잃은 성종은 무척 슬퍼했다고 해요.
최승로가 성종과 함께 한 기간은 채 10년도 안 돼요. 하지만 둘이서 만들고 싶어 했던 고려의 모습이 비슷했기에 서로를 의지하며 여러 가지 개혁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거예요. 많은 업적을 남기며 나라의 기틀을 다진 성종 옆에 명재상으로 불리는 최승로가 함께 있었던 거지요.
최승로가 죽은 뒤에도 성종은 고려의 정치 질서를 굳건히 하며, 유교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후 고려에서는 유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전통이 계속되었고, 이 전통은 조선으로도 이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