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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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을 체포한 러시아 경찰은 안중근을 일본 대사관에 넘겼어요. 이후 일본은 중국 뤼순에 있는 일본 대사관으로 안중근을 보냈어요. 이는 일본이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던 중국 뤼순에서 자신들 마음대로 안중근에 대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중국 뤼순의 일본 대사관 지하실에 갇힌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어요. 일본 검찰관이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는지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어요.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소. 첫째, 명성 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 넷째,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1차 조사를 마친 안중근은 1909년 11월 13일에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어요. 이튿날부터 일본에 의한 폭력적인 조사가 이어졌어요.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재판에서 일본 법정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어요. 그러자 안중근은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며 미소를 지었다고 해요.

한편, 안중근은 다시 재판을 받는 제도인 항소를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옳은 일을 했으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안중근의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어요. 또한 면회 온 두 동생을 통해 들은 어머니의 말씀도 이런 결심에 영향을 주었지요.


“너는 나라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니 만약 사형 판결을 받는다면 다른 마음먹지 말고 당당히 죽도록 해라.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큰 뜻에 따라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은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였어요. 『동양평화론』은 한국·중국·일본 3국의 관계를 ‘대등한 국가 관계’로 보면서, 이웃 국가에 대한 침략과 영토 확장을 비판하고 평화적 공존을 주장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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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전 두 동생과 빌렘 신부에게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뤼순 감옥의 사형장에서 32세의 짧은 생을 마쳤어요. 안중근이 사형 직전 자신을 데리러 온 간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라고 해요. 죽음조차 그의 당당함과 기개를 꺾을 수 없었어요.


안중근의 바람과 달리 우리나라는 일본의 침략에 35년간 식민지가 되었어요. 그러나 끊임없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패망으로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였지요. 안중근이 꿈꾼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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