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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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행사 계획을 들은 김구는 한인애국단이 나서 일본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윤봉길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했어요. 윤봉길은 자신이 하는 일이 개인적인 일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한인 애국단원이 되었어요. 그리고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행사가 열릴 예정인 공원을 미리 가보기도 했어요.
의거 3일 전 윤봉길 의사의 모습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가지고 행사장에 도착했어요. 11시 40분쯤 행사장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국가를 부르고 있을 때였어요. 윤봉길은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졌어요. 순식간에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단상 위에 있던 일본군 대장 등은 죽거나 다쳤어요. 도시락 폭탄은 의거가 실패할 경우 자결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는데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윤봉길의 의거
윤봉길은 의거 후 현장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바로 체포되었어요. 일제는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의 군법회의에서 윤봉길을 조사한 후 그를 사형시키기로 했어요. 그리고 윤봉길을 일본으로 보냈어요. 결국 윤봉길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일제는 윤봉길 의사가 한 일을 복수한다며 그의 유해를 가나자와 충혼탑 입구에 묻었어요.
김구 선생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광복 후인 1946년에 윤봉길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왔어요.
윤봉길의 의거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일본의 만주 침략 후 우리의 독립운동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던 중국 사람들의 시선이 변했거든요. 특히 중국의 한 지도자인 장제스는 이 일을 계기로 임시 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어요.
윤봉길의 의거를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며 비판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윤봉길은 개인적으로 일제에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니에요. 한인 애국단원으로서 한 일이지요. 한인 애국단은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일제의 주요 인물에게 폭탄을 던져 우리의 의지를 보여 주려고 했어요.
윤봉길은 거사를 며칠 앞두고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답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윤봉길이 어떤 마음으로 폭탄을 던졌는지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