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과 삼전도비

광해군과 인조의 서로 다른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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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시기 중국 대륙에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명나라가 힘을 잃어가고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점점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명과 후금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되었어요. 이때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요.


광해군은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명을 도와 군사를 보내자니 후금의 공격을 받을 것 같았어요. 반면, 군사를 보내지 않으면 명나라에게 거센 외교적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거든요. 자칫 잘못 판단하면 조선의 앞날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광해군은 일단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어요. 하지만 강홍립 장군에게 전투 상황에 따라 행동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어요.


강홍립은 광해군의 명령대로 처음에는 명을 도와 후금에 맞서 싸웠어요. 하지만 명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항복을 하고 후금과 싸울 뜻이 없음을 전했지요.

신하들 중에는 광해군의 이러한 대응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당시 명은 조선보다 강국이었고, 조선은 그러한 명을 오랫동안 섬겨 왔어요. 또한 임진왜란 때 명은 조선을 도와 군대를 보내줬어요. 신하들은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고 하면서 광해군을 거세게 비판했어요. 결국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인목대비가 나은 영창대군을 끔찍하게 죽였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광해군을 끌어 내리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지요.


왕이 된 인조는 광해군과는 다른 외교 정책을 취했어요. 여진족이 세운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멀리하고, 명을 받들며 친하게 지냈지요. 그러자 후금은 1627년 조선에 쳐들어 왔어요.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해요. 두 나라는 형제처럼 지내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을 끝냈지요. 이후 후금은 더욱 강성해졌어요. 민족 이름을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후금에서 청으로 바꿨어요.


청은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했어요. 형제관계에서 임금과 신하 관계의 예를 갖추라고 했어요. 청의 태도를 놓고 신하들 간에 의견이 나뉘었어요. 청과 전쟁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사람들과 외교적으로 잘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대립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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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침입도




조선이 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1636년 12월, 청은 12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 왔어요. 병자호란이 일어난 거에요. 청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넌지 며칠 만에 한성 가까이 들이닥쳤어요. 이 소식을 들은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했어요. 하지만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막혀 있는 상황이었지요. 인조와 신하들은 찬바람을 맞아가며 남한산성으로 옮겨가야 했어요. 그리고 청군에 맞서 싸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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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왕과 신하들




지금부터 남한산성을 돌아보며 병자호란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세히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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