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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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공부를 마친 김대건은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는 그해 10월 중국을 거쳐 평안도 의주까지 갔어요. 그러나 국경의 감시가 심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어요. 다른 방향으로도 길을 잡아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지요.
1845년 1월 드디어 김대건은 세 번째 시도 끝에 가까스로 조선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어요. 한양에 도착한 김대건은 신자들이 마련해 준 집에서 지내면서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어요. 후배 신학생들을 뽑아 신앙 공부도 시켰어요.
“이보시게. 은밀히 배 한 척 구해 주시게나. 바다 건너 중국에 있는 페레올 주교님을 모셔 와야겠네.”
그해 4월 김대건은 신자들과 함께 제물포 앞바다에서 배를 띄웠어요. 풍랑을 만나는 등 고생 끝에 일행은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였어요. 그곳에서 그는 페레올 주교를 만났어요. 주교는 김대건 일행을 상하이 부근의 김가항 성당으로 데리고 갔어요.
신부가 되는 김대건
이곳에서 김대건은 주교의 주관 아래 신부가 되는 의식을 치렀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어요.
그해 8월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 일행과 함께 50여 일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주교는 김대건에게 이렇게 요청하였어요.
“김 신부님, 각 지방을 돌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전도에 힘쓰세요.”
김대건은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주교 신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였어요. 그가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자, 페레올 주교는 말했어요.
“아무래도 중국에 있는 우리 사제들을 빨리 조선으로 데려와야겠소. 김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육지는 감시가 심하니 지난번처럼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육지는 감시가 심하니 지난번처럼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대건은 수소문하여 배를 구했어요. 일행을 태운 배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어요. 한강을 벗어나 제물포 바다를 거쳐 강화 앞바다로 나아갔어요. 이때 김대건은 배 위에서 뱃길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지도를 그렸어요. 백령도 부근 바다에서는 수많은 중국의 고기잡이배들이 열심히 고기잡이하고 있었어요.
김대건은 밤을 타서 고기잡이배 한 척에 올라, 중국 어부 한 사람을 은밀히 만났어요.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 그리고 꼼꼼히 그린 지도를 어부에게 건네주며 말했어요.
“부탁하오. 이 편지와 지도를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해 주시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김대건이 탄 배의 주인이 생선이 덜 말랐다고 하여 그들은 며칠 더 그곳에 머물러 있게 되었어요. 그러다 해안 지대를 순찰 나온 고을의 군졸들과 시비가 붙게 되었어요. 군졸들은 뱃사람들을 붙잡아서 갔고, 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만 김대건의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