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컨텐츠 정보
- 1 조회
- 목록
본문
동학은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백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최제우나 최시형 등과 같은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말이에요.
최제우의 가르침에 전국적인 동학도들이 생겼다는 것은 백성들이 바라는 그 무엇과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에요.
19세기는 세도 정치라고 해서 왕권은 약화되고 특정 또는 몇몇 가문의 권력 다툼이 잦은 때였어요. 그러다보니 세력가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지요. 탐관오리가 판을 치자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어요.심지어 세금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유랑민으로 떠돌기 일쑤였지요.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각 지방에서 크고 작은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어요. 한때는 전국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민란이 발생할 정도로 민심은 흉흉했어요.
한편 ‘서학’이라는 서양의 문물과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한때 사람들은 서학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도 하였어요. 하지만 큰 나라로 섬겼던 청이 서양 세력에 맥없이 무너지자, 서학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지요.
상황이 이런데도 당시 지배층들은 성난 민심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어요.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만 관심을 두었지요.
백성들은 시대와 정치를 비관하며 스스로를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민간 신앙을 믿었어요. 예언 사상, 미륵신앙, 굿이나 살풀이의 무속 신앙 등이 유행하며 사람들의 불안함을 달래 주곤 하였지요. 하지만 이것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요.
하지만 동학은 달랐어요. 동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겨져 있던 소박한 소망과 염원과 유, 불, 선 그리고 천주교까지 포함하고 있었어요. 그야말로 동학은 당시의 모든 사상을 포용한 종합 종교라 할 수 있었어요.
전통 유학자 가문에서 유학을 깊게 공부한 최제우가 창시했고, 우리나라 전통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은 한학과 유학을 공부한 대다수 몰락 양반에서부터 천민에게까지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될 수 있었어요.
뒤숭숭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동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사람들은 최제우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지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동경대전은 동방에서 생긴 학문(동학)의 경전을 말해요. 한문으로 쓴 동경대전이 사대부와 지식인을 위한 것이라면, 한글로 된 용담유사는 대중적인 교리서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조선 시대가 사농공상의 구분이 뚜렷한 신분 사회였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동학의 사상은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이었어요. 어찌 보면 근대의 인간 존엄 사상이나 평등사상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할 만하지요.
동학의 사상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힘들고 지친 백성들에게 깨우침을 주었고, 훗날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어요.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항일의병 정신으로 이어졌지요.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이나 대표적 민족지도자인 백범 김구도 모두 동학을 믿었던 사람들이었어요. 오늘날까지 동학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요.
최제우 동상(대구 중구 달성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