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내다
컨텐츠 정보
- 28 조회
- 목록
본문
1592년 4월 부산 앞바다로 일본군들이 쳐들어왔어요.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에요. 일본군은 부산을 함락하고 한양을 향해 물밀 듯이 쳐들어왔어요. 준비가 덜 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졌어요. 굳게 믿었던 신립 장군 마저 충주에서 일본군에 패하자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국왕 선조는 한양에서 평양으로 피난을 떠나기로 했어요. 일본군들은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어느새 한양까지 왔어요. 이 때 유성룡은 영의정으로서 군사의 총책임자 역할까지 맡아야 했어요. 유성룡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병사들이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부상을 당한 백성들을 돌보고 위로했어요. 유성룡은 백성들과 마주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흘렸어요.
‘어찌 하여 우리 백성들이 이런 고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너무나 처참하고 슬프다!’
유성룡은 굳게 마음을 먹고 꼭 일본군을 무찌르고 백성들이 평안해질 수 있도록 사방팔방으로 애를 썼어요. 이런 상황 속에서 전쟁 상황이 더 나빠지자 선조 임금은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어요. 임금을 태운 수레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유성룡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야기했어요.
“전하, 이 수레가 압록강을 넘으면 아니 되옵니다. 중국 땅으로 단 한 걸음이라도 들어가면 이 나라는 영원히 되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 남아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유성룡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의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어요.
다행히 상황이 바뀌어가고 있었어요. 유성룡이 추천했던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고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일본군을 무찔렀어요. 이후 조선을 돕기 위해 온 명나라 군대와 함께 빼앗긴 평양성을 되찾았어요.
더불어 유성룡이 추천했던 권율 장군은 평양성에서 쫓겨난 일본군들을 행주산성에서 크게 무찔렀어요. 유성룡은 일본군과 맞선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임진강에서 칡넝쿨로 배다리를 만들어 조선군의 대포와 군수 물자를 이동시키게 하였어요.
부산진순절도
1592년 4월 13일과 14일 이틀간에 걸쳐 부산진에서 벌어졌던 일본군과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문화재청
유성룡과 칡넝쿨 부교
유성룡은 전쟁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돌보는 한편 명나라 군대와 협상에도 나서야 했어요. 조선을 도와주러 온 명나라는 조선의 사정을 헤아리기 보다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고 했어요. 이에 유성룡은 조목조목 원칙들을 이야기하면서 명나라를 설득했어요.
그러나 임진왜란이 거의 끝날 무렵 유성룡은 반대파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한참이 지난 뒤 선조는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후회하며 유성룡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었어요. 그리고 다시 조정으로 불렀어요. 하지만 유성룡은 끝내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