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정조, 수원 화성을 건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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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사도 세자)를 여의었어요. 아버지의 죽음을 본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컸지요.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아버지의 묘를 더 좋은 곳으로 옮기기로 했어요.


정조는 화산에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원래 화산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할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화성이예요. 지금의 행정구역 명칭은 수원이지요.


화성은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조의 꿈이 담긴 신도시였지요. 1794년(정조 18) 1월에 시작한 공사는 1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1796년(정조 20) 9월 초에 완공했어요. 3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처럼 빨리 완공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철저한 계획을 바탕으로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를 비롯한 여러 기구들을 이용하고,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사 책임제 등을 실시한 덕분이었어요.


정조는 화성이 한양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 상업 도시로 만들었어요. 상인들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게 여러 가지 정책도 펼쳤어요. 나라에서 돈을 빌려주고, 상점도 만들어 주었지요. 또 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넓은 농장과 저수지도 곳곳에 만들었어요.

수원 화성은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도시였어요. 정조는 수원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들을 훈련시켰어요.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정치권력을 갖기 위해 서로 싸우고 견제하는 신하들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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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축조 모습




수원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꽃으로 꼽히는 건축물이에요. 봉돈, 공심돈, 암문과 같은 특별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어요. 각각의 건축물들은 기능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답니다.

화성은 우리나라의 전통 성곽 기술과 당시 외국의 성 쌓는 기술을 연구하고 그 장점만을 모아 만들어진 성이에요. 또한 수원 화성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읍성의 기능이 있으면서도 혹시라도 전쟁이 나면 방어할 수 있도록 여러 군사시설을 갖추었어요.


정조는 공사가 마무리된 후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을 펴내도록 했어요. 화성 공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모으로 정리한 것이죠. 이 책 덕분에 일부분이 무너지고 사라진 화성을 제대로 복원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직접 가보면 언덕을 따라 성을 쌓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요. 곳곳에 벽돌을 이용해 쌓은 성곽의 모습도 볼 수 있고요.


자, 지금부터 수원 화성의 특징을 살펴보고 얽힌 이야기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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