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무관 학교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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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무관 학교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어요.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중국 군벌 세력들은 자기들 땅에 한국인들이 조직한 독립군이 많아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일본 역시 독립군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탄압할 구실을 찾고 있었어요.
결국 일본은 중국 군벌 세력을 설득해 합동 수색대를 편성한 뒤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은 물론 민족 학교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했어요. 1920년 5월 중일 합동 수색대는 서간도 유하현과 그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살해하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 신흥 무관 학교의 교관과 학생들은 1920년 7월 안도현으로 이동하였지만, 결국 8월경에 신흥 무관 학교의 문은 닫게 되었어요.
비록 일본군과 중국 군인 세력의 탄압 때문에 신흥 무관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그 의미와 영향은 끊어지지 않았어요. 신흥 무관학교는 신흥 강습소 시절부터 10여 년에 걸쳐 독립군을 길러내며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어요. 이들은 각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무장 투쟁의 주역으로 활약했지요.
1920년 10월 간도의 청산리 일대에서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어요. 이 승리를 청산리 대첩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독립군 중에는 신흥 무관 학교 출신들이 많았어요.
이뿐만이 아니었어요. 1920년대 조선 총독,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려는 의거 활동이 이어졌는데, 그 중심에 의열단이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단장 김원봉을 비롯해 의열단의 초기 단원이 13명이었는데, 그 중 10명이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이었지요.
이후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활약한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군을 비롯해 1940년에 결성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사 조직인 한국광복군의 지휘관들 중에도 신흥 무관 학교 출신들이 많았어요.
일제 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많은 독립군이 일본에 맞서 싸웠어요. 신흥 무관 학교 출신들이 그 중심에 서서 큰 활약을 했어요. 이처럼 신흥 무관 학교는 일제 강점기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항일 무장 투쟁의 소중한 씨앗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