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펼친 의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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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도 의거가 일어났어요. 먼저 앞에서 이야기했던 중국 상하이 황포탄 의거가 있었어요. 의열단은 1922년 3월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가 배를 타고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를 총으로 저격하기로 했어요. 이 작전에는 의열단 부단장인 이종암, 국내에서 조선 총독부 건물에 폭탄을 던지고 중국으로 탈출했던 김익상, 그리고 오성륜 3명의 의사가 참여했어요.
3월 28일 오후 3시쯤 일본 육군 대장이 탄 배가 황포탄 부두에 도착했어요. 육군 대장이 배에서 내리자 먼저 오성륜 의사가 권총 두 발을 쏘았어요. 안타깝게도 육군 대장이 아니라 그의 앞에 있던 서양인 여성이 총에 맞았어요.
총소리에 깜짝 놀란 육군 대장이 자동차로 도망치자 이번에는 김익상이 권총을 쏘았어요. 김익상이 쏜 총알은 모자에 맞았어요.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자동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어요. 폭탄은 자동차 바퀴 밑으로 굴러갔지만 터지지 않았어요. 이를 지켜보던 영국 군인이 폭탄을 물속으로 차버려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어요.
황포탄 의거 후 김익상과 오성륜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혔어요. 두 사람은 일본 총영사관 구치소에 갇혀 온갖 고문을 받았어요. 그러던 중 오성륜은 탈출에 성공했고, 김익상 혼자만 일본으로 보내져 재판을 받았어요.
“마지막으로 피고에게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말하라.”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질문을 하자 김익상이 대답한 것이라고 해요. 김익상은 1943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21년 만에 석방되었어요. 그런데 감옥에서 풀려난 후 조선 총독부 형사에게 끌려갔는데 그 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요.
김익상 의사
독립기념관
일본에서도 의열단의 활동이 있었어요. 그 주인공은 김지섭 의사에요. 김지섭은 권총 1개와 폭탄 3개를 가지고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왔어요. 원래 계획은 1924년 1월에 열리는 일본의 제국 의회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의회 개최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꿔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지기로 했어요.
1924년 1월 5일 김지섭 의사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왕궁 앞 다리에 접근하여 3개의 폭탄을 연이어 던졌어요. 그런데 3개의 폭탄은 모두 터지지 않았어요. 아마도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배를 타고 오는 동안 폭탄에 습기가 스며들어 녹슬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김지섭의 의거는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요.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그것도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졌기 때문이지요. 김지섭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어요. 그러던 중 1928년 일본 지바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김지섭 의거지(일본 도쿄)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