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농민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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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 19살 무렵의 일이었어요. 공부하다가 쉬는 시간에 산책하고 있는데 한 청년을 만났어요. 그 청년은 윤봉길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여기에 있는 것 중에 제 아버지 이름을 찾아주세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아버지 묘가 어떤 건지 헷갈려서 공동묘지에 있는 팻말을 모두 뽑아왔어요.”

“아버님 성함이 적혀 있는 것은 이것인데 어느 무덤에서 뽑아왔는지 표시했나요?”


청년은 그제야 자신이 팻말을 뽑을 때 표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결국 자신의 아버지 무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덤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죠. 청년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윤봉길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 청년처럼 우리 민족이 계속 글을 깨치지 못한다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그래서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1926년 윤봉길은 야학을 열었어요. 야학에는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듬해에는 야학에서 쓸 교재인 『농민독본』이라는 책도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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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윤봉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1929년 4월 윤봉길은 농민 단체인 ‘월진회’도 만들었어요. ‘월진회’는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회비를 모아 농가에 새끼 돼지나 닭을 키우게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강연회도 열었어요. 윤봉길은 이 단체의 회장이 되어 활발하게 농민운동을 펼쳤어요.


그러던 중 1929년 11월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어요.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족 차별에 반대하여 일어난 이 운동은 나라 곳곳으로 퍼져나갔어요. 일제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탄압했어요. 윤봉길은 이 운동을 지켜보면서 농민을 잘살게 하는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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