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담을 넘어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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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의 문제는 외부의 간섭 없이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어요. 민족자결주의는 이후 식민지 여러 나라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벌였어요. 우리 민족 지도자들도 온 민족이 참여하는 만세 운동을 벌여 우리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준비했어요.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한날이 바로 고종 황제 장례식 이틀 전인 3월 1일이었어요.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문 앞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어요.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원통한 마음에 고종의 마지막 길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이 올라왔거든요.
민족 대표들은 계획대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어요. 비슷한 시각, 탑골 공원에서는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학생 대표가 팔각정으로 올라가 독립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어요.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은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만세를 불렀지요. 그리고 거리로 나가 소리 높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어요.
거리 시위대에 유관순도 끼어 있었지요.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친구들과 함께 ‘학생 결사대’를 결성해 거리로 나갔던 거예요.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화학당은 교문을 걸어 잠갔어요. 그러나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 담을 넘어 시위에 참여했어요.
덕수궁 앞 만세 시위
독립기념관
유관순은 3월 5일 남대문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도 참여했지요. 그날 시위는 학생들이 앞장선 시위로, 앞선 시위 때보다 더 많은 학생이 거리로 나왔지요. 유관순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지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곧 풀려날 수 있었어요.
학생들의 시위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자, 일제는 휴교령을 내려 학교 문을 닫게 했어요.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유관순은 사촌 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기차 안에서 들리는 칙칙폭폭 소리는 마치 대한 독립 만세 소리처럼 들리는 듯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