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 정부 유적

항일 투쟁의 마지막 근거지, 충칭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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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대륙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대장정을 계속해야 했어요. 임시 정부가 자리 잡은 곳에 일제의 폭격이 이어졌지요. 결국 몇 개월 만에 짐을 싸 이동하는 생활이 계속되었어요.


1940년, 마침내 중국 국민당 도움으로 충칭에 도착해 청사를 마련했어요.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가 마련된 곳이었어요. 충칭 청사는 1940년부터 1945년 11월까지 사용되었던 곳이에요. 이 시기를 충칭 시기라고 하지요. 충칭 청사는 항일 독립 투쟁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곳이지요.

이 시기 임시 정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합류하여 대일전쟁에 힘을 보탰어요. 충칭시기 임시 정부는 헌법도 개정하고, 건국의 방향을 보여주는 ‘건국 강령’도 제정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했어요.


언덕 위 비좁은 골목 계단 옆에 위치한 청사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충칭 청사는 상하이나 항저우 청사와 달리 제법 규모가 커요. 청사로 사용된 건물이 몇 동이 있는데, 비교적 잘 복원되고 보존된 편이에요.


충칭에 청사를 마련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일제에 적극적으로 맞섰어요. 1940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도 만들었어요. 독립 전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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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연화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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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 사무실과 국무회의 회의실 모습

독립기념관




임시 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일제에 선전 포고를 했어요. 1943년에는 영국군과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어요. 미국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에 침투할 작전도 준비했답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는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사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임시 정부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어요. 당당하게 전쟁을 해 승리를 거두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낼 기회를 잃어버렸으니 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임시 정부 사람들이 국내로 돌아오는 것도, 임시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답니다. 통합된 정부가 아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거예요.


1945년 11월 3일, 고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임시 정부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본적이 있나요? 청사 가운데 계단에 서서 찍은 사진 말이에요.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그들의 바람이 느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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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 요인 환국 기념 사진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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