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 정부 유적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컨텐츠 정보

본문

3·1 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지요. 그들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를 마련했어요. 그리고 그해 9월에는 국내외 있던 여러 임시 정부들이 하나로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출범했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상하이에 13년 동안 머물며 청사도 여러 번 옮겼어요.



c888d33515da063a792bccac114bb583_1746484716_1385.JPG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 신년 축하 기념사진

독립기념관

지금 남아 있는 상하이 청사는 그곳 중 하나이지요. 그런데 상하이 청사에 직접 가보면 ‘정말 한 국가의 정부가 이런 곳에 있었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낡은 주택가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붉은 색 벽돌 건물이거든요. 머나먼 중국 땅에 와 정부를 만들고 독립 투쟁을 펼쳐나갔던 독립운동가들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요.


그나마 한국과 중국 정부의 노력으로 상하이 임시 정부 건물에 대한 공동 조사가 이루어졌어요. 그 결과 1993년 일제 강점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시작했지요.



c888d33515da063a792bccac114bb583_1746484772_1153.JPG
대한민국 임시 정부 상하이 청사

독립기념관




청사를 마련한 임시 정부는 나라의 독립을 찾고, 국민이 주인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이승만이 대통령, 이동휘가 국무총리가 되어 임시 정부를 이끌어갔어요. 국내외 연락을 위해 비밀 행정 조직인 연통제를 실시했어요. 교통국과 통신국도 두어 국내는 몰론 다양한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했지요.


독립신문도 발간했어요. 그 신문이 미국 하와이까지 전해졌고, 국내에도 몰래 전해져 임시 정부의 활동을 알 수 있도록 했지요.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임시 정부에 위기가 닥쳤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이나 국제 연맹이 우리나라를 통치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졌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활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무장 투쟁을 주장했던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국민 대표 회의 소집을 요구했어요.


1923년에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어요. 임시 정부를 해체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계속 임시 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람들로 나뉘어져 대립했어요.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주요 인물들이 모두 임시 정부를 떠났어요. 재정 또한 넉넉지 않아 어려움은 더 했지요. 천여 명 가까이 되었던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떠나가고, 이제는 겨우 수십 명만 남는 힘겨운 상황이 되었지요.

이러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김구는 1931년 비밀리에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어요. 1932년에는 한인 애국단 소속인 이봉창이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윤봉길이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는 독립 투쟁을 펼쳐 큰 성과를 이루어냈어요. 윤봉길이 의거를 일으키자 일본군은 임시 정부 청사에까지 들이닥치는 등 김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켰어요. 이후 임시 정부를 지키기 위해 상하이를 떠나 고난의 이동 생활을 시작했어요.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6 / 1 페이지
RSS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