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을 바탕으로 삼아 개화 사상가를 키워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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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중국 방문에서 돌아온 박규수는 흥선 대원군에게 나라의 문을 열고 외국과 교류해야 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어요.
그 후 박규수는 한양 북촌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서 양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어요. 그 내용은 주로 할아버지의 북학파 실학사상과 자신이 중국에 가서 보고 배운 것이었지요. 이때 모여서 그에게 근대 문물을 배운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등이에요.
박규수와 개화당 사람들
그들은 훗날 개화파가 되어 조선이 근대적 국가가 되는데 나름의 역할을 해요.
그러던 중 1875년에 일본은 운요호(운양호)라는 배를 앞장세워 강화도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개항을 요구했어요. 이때 흥선 대원군과 최익현 같은 유학자들은 외국과 조약을 맺는 것에 적극으로 반대했어요. 이와 달리 박규수와 개화파들은 항구를 열어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1876년 고종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었어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는 장면
국사편찬위원회
강화도 조약은 우리가 외세와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에요. 그러나 조약의 내용은 우리에게 불리했어요. 예를 들면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죄를 지어도 우리 법으로 벌을 줄 수 없고, 일본 배가 우리나라 해안을 마음대로 조사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에요.
강화도 조약의 내용은 박규수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조약의 내용이 전해지자 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박규수를 비난했어요. 박규수는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다 그만 병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후 1년 만인 1877년 세상을 떠났어요.
강화도 조약은 우리가 외세와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에요. 그러나 조약의 내용은 우리에게 불리했어요. 예를 들면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죄를 지어도 우리 법으로 벌을 줄 수 없고, 일본 배가 우리나라 해안을 마음대로 조사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이에요.
강화도 조약의 내용은 박규수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조약의 내용이 전해지자 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박규수를 비난했어요. 박규수는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다 그만 병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후 1년 만인 1877년 세상을 떠났어요.
박규수가 죽은 후 그의 사랑방에 모여 학문을 배웠던 사람들은 개화파가 되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박규수를 북학파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