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어린 임금을 위해 『성학십도』를 지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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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 중국의 사신들이 오자 명종은 사람을 보내 이황에게 서울로 올라오라고 요청했어요. 이황은 임금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서울로 다시 올라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어요. 다시 관직 생활을 하던 중 1568년 명종이 죽고 17세의 나이 어린 선조가 왕위를 이어받았어요. 선조도 이황에게 자신의 곁에서 관직 생활을 계속할 것을 요청했어요.
그러나 이황은 정치적으로 출세하기보다는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데 힘을 쏟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황은 자신이 일생 동안 연구한 성리학의 핵심을 10개의 그림으로 요약한 『성학십도』를 작성하고 그것을 올리는 까닭을 적어서 선조 임금께 바쳤어요.
『성학십도』의 표지와 내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하! 제가 나라에 보답할 길은 이 그림뿐입니다. 부디 성군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려주시옵소서.”
이황은 『성학십도』에서 백성의 지도자인 국왕이 모범을 보여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선조는『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게 하고, 그 내용을 교훈으로 삼아 정치를 펴나갔어요.
이듬해인 1569년 3월, 이황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기를 원했어요. 선조는 이황이 좀 더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그의 뜻이 굳건함을 알고는 더 말릴 수가 없었어요.
고향에 돌아온 이황은 도산 서당에서 제자들에게 온 힘을 다해 학문을 가르쳤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1570년 12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어요.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선조는 슬퍼하며 최고 관직인 영의정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를 것을 명했어요.
이후 이황이 길러낸 많은 제자는 이후 조선을 이끌어가는 훌륭한 학자나 관리가 되었어요. 또한 그가 강의했던 작은 도산 서당은 이후 건물이 늘어 도산 서원으로 확대되었어요. 그 후 도산 서원은 경상도를 넘어 조선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발전했지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폐 1,000원권 앞면에는 이황의 초상화와 그가 근무했던 성균관 명륜당 건물이 있고, 뒷면에는 도산 서당과 주변 경치를 담은 그림이 있어요. 이처럼 화폐에 담길 정도로 이황은 조선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랍니다.
여러분! 이번 방학 때 도산 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