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서당에서 제자를 길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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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관직 생활보다는 고향에서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내기로 마음먹었어요. 풍기 군수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을 다시 시작했어요.
그러나 임금이 사람을 보내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후 더 높은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여러 차례 사양했어요. 1545년부터 1560년까지 관직에서 사퇴하거나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 20여 차례나 되었답니다.
1560년 이황은 고향 마을에 도산 서당을 짓고 7년 동안 살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어요. 명종 임금은 여러 차례 이황에게 다시 관직에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이황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그러자 명종 임금은 몰래 화가를 보내 이황이 사는 마을의 경치를 그려 오게 했어요. 그리고 그 그림을 궁궐 벽에 붙여 놓고 종종 보았지요. 또 여러 신하에게 ‘어진 선비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기도 했어요.
이황은 제자들을 기르는 데 모든 힘을 다했어요. 제자들은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자들이 모두 양반이었던 것은 아니에요. 대장간에서 쇠붙이로 농기구를 만들어 팔던 대장장이 배순이라는 사람도 있었지요.
배순은 양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공부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그러나 배움에 뜻이 있던 그는 소수서원 뜰에서 무릎을 꿇고 몰래 수업을 들었어요. 어느 날 이황은 배순을 불러 자신이 강의한 내용을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어요.
그러자 이황은 배순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대요. 조선 시대에는 양반이 아닌 대장장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황은 대장장이에게도 배움의 길을 열었던 참된 스승님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