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컨텐츠 정보
- 3 조회
-
목록
본문
스물한 살에 결혼한 이황은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과거 시험에 응시했어요. 유학 공부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 이황이었지만 과거 시험은 쉽지 않았던지 세 번 연속으로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스물일곱 살에 드디어 소과에 합격했어요.
당시 조선의 과거 제도는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 있었어요. 소과는 초시·복시의 2단계, 대과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를 거쳐야 했어요. 소과의 초시·복시에서 합격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소과의 초시·복시에서 합격하면 대과 준비를 위해 성균관이라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에 입학해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요.
이황이 소과 복시에 합격한 직후 이황의 아내 허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이황은 큰 슬픔에 잠겼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서 권씨 집안의 여인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어요. 집안은 안정을 되찾았고 이황은 다시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어요.
드디어 서른네 살이 되던 1534년(중종 29) 봄, 이황은 34세의 나이로 대과에 합격해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어요. 승문원은 외교 문서를 다루던 관청이에요.
이황은 비록 늦은 나이에 대과에 합격했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어요. 1536년에는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 무렵 이황에게는 또다시 슬픈 소식이 전해졌어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어요.
이황은 서둘러 안동 고향 마을로 내려갔어요. 어머님 장례를 치른 그는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2년 동안 무덤을 지키며 돌봤어요. 원래 몸이 약했던 그의 건강은 이때 더욱 나빠졌어요.
이황은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관직 생활을 이어나갔어요. 당시 조선의 임금은 명종이었는데, 신하들끼리 다투는 일이 잦아서 정치가 매우 혼란했어요. 결국 이황은 나빠진 건강을 핑계 삼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이때 이황은 그의 고향에서 가까운 토계에 양진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이를 계기로 해서 동네 이름은 토계에서 퇴계로 바뀌었고, 자신의 호(號) 역시 그것으로 정했대요. ‘토계(兎溪)’라는 말은 ‘토끼가 뛰어노는 골짜기’라는 뜻이고, ‘퇴계(退溪)’는 ‘물러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