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영조, 드디어 탕평의 깃발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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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경종이 4년 만에 죽자 연잉군은 드디어 왕위에 올랐어요. 이제 소론이 물러나고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지요.


“오늘도 신하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만을 하는구나. 백성은 없고 자기 당만 있구나.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어.”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 역시 붕당 정치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붕당 간의 다툼이 얼마나 나쁘고 무서운지 영조 자신은 잘 알고 있었어요.


“더 이상 신하들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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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을 명하는 영조




영조는 붕당 정치를 잠재우기 위해 인재를 고루 써서 나라를 올바로 세우기로 결심하였어요. 신하들에게 말했어요.


“들으시오! 그대들이 지금 붕당을 지어 서로 헐뜯고 다투니 나랏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소. 이에 나는 탕평의 뜻을 세워 앞으로 붕당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쓸 것이오!”

마침내 영조는 신하들에게 ‘탕평책’을 선포하였어요. ‘탕평’은 유교 경전에서 따온 말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히 한다는 뜻이에요.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우두머리를 불러 서로 화해하도록 하였어요. 따르지 않는 신하들은 과감히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여 자신의 뜻을 강하게 보여 주었어요. 관직도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소론 중에서 뽑았어요. 어느 한쪽의 힘이 세지지 않도록 균형 있게 등용하였어요. 또한 상대편 잘못을 역모로 몰아서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는 보복 정치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노력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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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서울 종로구)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고 쓰여 있어요.




한편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널리 알리고 신하들이 언제라도 탕평의 의미를 되새기라는 뜻에서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웠어요.

강력한 탕평 정책 덕분에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위한 여러 가지 개혁들을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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