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함께 고려 개혁이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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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차게 고려를 개혁해 가던 공민왕의 앞길을 가로막는 일이 벌어졌어요.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남쪽으로는 왜구가 고려를 침략해 온 것이에요. 홍건적은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이었어요. 원의 군대에 쫓겨 홍건족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까지 피란을 가기도 하였어요.
왜구는 일본의 해적으로, 일찍부터 물자가 풍부한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어요.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했고, 개경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어요. 두 외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큰 혼란을 겪었어요.
외적의 침입보다 공민왕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황후 노국공주의 죽음이었어요. 노국공주는 공민왕이 볼모로 원에 끌려갔을 때 만나 결혼을 했어요. 결혼 후 함께 고려에 온 노국공주는 공민왕이 외롭고 힘들 때 늘 곁을 지켜주던 사람이었어요. 공민왕이 매우 사랑한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 죽고 말았어요.
노국공주가 죽고 의욕을 잃은 공민왕은 승려 출신의 신돈에게 개혁을 이어가도록 하였어요. 신돈은 공민왕의 기대에 부흥해 새로운 관청을 만들어 지배층이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어요. 처음엔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았고, 개혁도 성공하는 듯 했어요. 하지만 신돈도 점차 권력층을 닮아 부패해 갔고, 공민왕의 믿음도 잃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어요.
신돈의 죽음과 함께 공민왕의 개혁도 끝이 났어요. 하지만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다시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던 공민왕의 노력은 길이 남을 업적이라 할 수 있지요.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무덤 옆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어요. 죽어서도 노국 공주와 함께 있고 싶었던 거예요. 혼란한 시대 속에서 함께 의지하며 어려움을 헤쳐 나갔던 두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공민왕릉(개성 개풍군)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