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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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이 진주판관에 부임한 다음 해인 1592년 임진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어요. 일본군은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조선군을 패배시키고 백성들을 약탈했어요.
‘드디어 왜적들이 쳐들어왔구나!’
지리적 요충지인 진주성
김시민은 오래 전부터 이런 침략에 대비해 군사들을 훈련시켜 왔어요. 잘 훈련된 김시민 장군과 그 병사들은 일본군의 침략이 두렵지만은 않았어요. 김시민은 부하들과 함께 거창과 진해 그리고 창원 등을 침략한 일본군을 무찌르면서 큰 공을 세웠어요.
일본군은 잇달아 김시민 장군에게 패하면서 기가 꺾였어요. 그러면서도 경상도 남부지역의 핵심이자 호남 지역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어요. 이를 위해 일본군 중 강력한 수만 명의 병사들을 진주성으로 이동시켰어요.
김시민도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할 진주성에는 약 3,000여 명 가량의 군인밖에 없었어요.
“장군, 우리 병력으로는 왜적들과 맞서 싸우기 힘듭니다.”
“걱정 마시게. 우리는 오직 이 날을 준비해 오지 않았던가. 비록 병사는 부족하지만 맹훈련을 한 병사들과 또 우리를 응원하는 진주 백성들이 있네.”
김시민은 철저하게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어요. 성안에 있는 여성과 노인들에게도 군복을 입혀 야간에 횃불을 들게 했어요. 성안에 군사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죠. 또한 처음부터 일본군에게 활을 쏘지 말라고 했어요. 화살을 아끼면서 결정적일 때 집중 공격을 펼치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비격진천뢰, 현자총통, 화약 등의 무기들을 준비해두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어요.
진주성과 촉석루
드디어 1592년 10월, 구름처럼 많은 일본군들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일본군은 진주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로 높은 사다리 등을 동원해서 성벽을 기어오르고 조총을 쏘면서 공격해왔어요.
김시민은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전투를 지휘했어요. 군사들과 백성들은 김시민의 지시를 따르며 온 힘을 다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어요. 이런 노력 덕분에 첫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어요.
“우와, 우리가 이겼다!”
진주성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얼싸 안으며 이날의 승리를 기뻐했어요. 하지만 전투는 끝나지 않았어요. 일본군은 진주성을 놓칠 수 없다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어요.
진주대첩
성안의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돌과 흙 등을 던지면서 진주성을 넘어오려는 일본군에 맞서 싸웠어요. 게다가 진주 부근에 있던 의병 부대들이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어요.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은 진주성으로 지원 부대를 보내 일본군을 무찌르는데 도움을 주었어요. 김시민의 지휘 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힘을 모아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기적처럼 물리칠 수 있었어요.
일본군은 조선군과 조선 백성들의 맹렬한 저항으로 진주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물러갔어요. 이 전투를 진주 대첩이라고 불러요. 진주 대첩은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진주성내의 병사와 백성들 그리고 의병들이 죽기를 각오한 채 3만의 일본군을 무찌른 대승으로,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일컬어져요.
이 전투의 승리는 아주 중요했어요. 당시 진주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에요.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바닷길이 막힌 일본군은 군량미가 부족한 상황에서 진주성을 넘어 호남 지역으로 가려고 했어요.
이에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은 온 힘을 다해 일본군이 호남 지역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를 지켜냈어요. 이로 인해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김시민은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어요. 김시민의 사망 소식은 처음에는 비밀로 했어요. 용맹한 김시민 장군이 없다면 다시 일본군이 쳐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후 상황이 안정되고 나서야 비로소 김시민의 장례식을 치렀어요.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진주대첩의 큰 공을 세운 김시민에게 공신교서를 내렸어요. 공신교서는 임금이 국가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주는 공문서에요. 김시민에게 내린 공신교서를 보면 당시 김시민의 공적과 그에 따른 포상 내용이 담겨 있어요. 공신교서는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가면 직접 살펴볼 수 있어요.
사실 이 공신교서는 여러모로 소중한 유물이에요. 임진왜란 당시 상황과 옛날 문서를 살필 수 있는 연구 자료이기 때문이에요. 특히 이 공신교서는 국민들이 모금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된 것을 되찾아 온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이로 인해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에요.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과 소중한 유물을 되찾아 온 오늘날의 역사를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김시민 선무공신교서 중 일부
국립진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