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추사체를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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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병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내는 등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관직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1840년에 윤상도라는 관리가 고위 관료의 비리를 상소문을 올렸어요. 그러나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반대로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윤상도가 상소문을 쓰는 데 김정희가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어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게 된 김정희는 약 9년 동안 학문 연구와 글씨 연습에 몰두했어요.
‘그동안 나는 중국의 글씨를 흉내만 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어야지.’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며 글씨 연습을 반복하던 김정희는 드디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어 냈어요. 조선은 물론 중국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오직 김정희만의 글씨체인 추사체였지요. 당시 이름난 학자이자 관리였던 박규수는 추사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어요.
잔서완석루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추사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유산채널
“여러 훌륭한 서예가들의 장점을 모아, 마치 신이 쓴 듯 기가 느껴진다. 바다의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다.”
한편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살이의 외로움과 슬픔을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달랬어요. 그의 친한 벗은 직접 제주도를 찾아와 김정희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했어요. 또한 그의 제자였던 이상적은 통역관으로 청의 연경에 갔다가 김정희가 좋아할 만한 귀한 서적들을 구해서 제주도로 보내주었어요. 이에 김정희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세한도’라는 그림을 그려서 이상적에게 보내주었어요.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
문화재청
‘세한도’를 보면 한 채의 집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잣나무와 소나무를 그려 이상적과의 변치 않는 의리를 표현했어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에서 ‘세한(歲寒)’은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말해요. 또한 그림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도 그려져 있으며, 그림 왼편으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안다.”라는 이치에 빗대어,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라는 글이 있어요. 즉, 김정희가 잘 나갈 때는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람들이 죄인의 몸으로 유배를 가니 아무도 찾지 않았는데, 이상적만이 그를 찾아와 준 데 대하여 그의 성품을 항상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1848년에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다시 당쟁에 휘말려 1851년 관직에서 쫓겨난 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어요.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어요.
김정희는 귀양살이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어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를 존경하는 선비들이 여기저기서 찾아왔기 때문이었어요. 또한 농민들까지 여러 가지 유물과 미술품을 감정받기 위해 김정희를 찾아왔어요. 다양한 문화재를 감정하면서 예술품에 대한 김정희의 학문적 깊이는 더욱 깊어졌어요.
김정희는 귀양살이를 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어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를 존경하는 선비들이 여기저기서 찾아왔기 때문이었어요. 또한 농민들까지 여러 가지 유물과 미술품을 감정받기 위해 김정희를 찾아왔어요. 다양한 문화재를 감정하면서 예술품에 대한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졌어요.
다행히 1년여 만에 귀양이 풀린 김정희는 이후부터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어요. 대신 김정희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글과 그림을 그리며 지냈어요. 그러다가 1854년 10월 71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김정희는 18세기 말에 태어나 19세기 세도 정치라는 정치적 혼란기에 활동한 인물로, 서예, 비석 글씨 해석 등의 분야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학자이자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