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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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 갔어요. 천주교에서는 천주님(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였어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오직 천주님을 모시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조선은 충효 정신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유교의 나라였어요.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요.
조선은 천주교가 나라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부모와 임금을 부정한다고 여겼어요. 또한 서양 세력과 한통속이 되어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의심하였지요. 그래서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하였고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어요.
1791년 천주교인 윤지충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가 사악한 종교를 믿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였지요. 이를 신해년(1791년)에 일어난 박해라 해서 신해박해라고 해요.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났어요. 이때 선교사 주문모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지요. 1839년에도 천주교인 백여 명이 처형당하는 기해박해가 일어났어요. 이때 김대건의 아버지도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도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지요.
잇따른 박해로 외국인 사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어요. 그 속에는 증조부를 비롯한 다수의 김대건의 집안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김대건은 왜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잃는 위험까지 무릅쓰며 천주교 신부가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