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5년(희종 1) 평소 지눌을 존경해왔던 국왕 희종(고려 제21대 왕)은 산의 이름을 조계산으로, 절의 이름을 수선사로 각각 바꾸고 자신이 직접 쓴 ‘조계산 수선사’라는 현판을 내려주었어요. 이로써 수선사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고려 선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어요.지눌은 열심히 법회를 열었지요. 낮에는 강연하고, 밤에는 사람들과 함께 수행에 전념하였어요. 마치 소의 걸음처럼 묵묵히 결사 운동을 실천해 나갔어요.“난 선종을 흥하게 하려고 법회를 여는 것이 아니오. 선종, 교종으로 나누어 구별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우리 불교가 백성들에게 쉼과 평화가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오.”지눌은 불교가 폐단에 빠진 것은 승려가 계율을 우습게 여기고 행실을 함부로 했기 때문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승려들이 지켜야 할 규율을 정리했지요.지눌의 노력으로 고려의 불교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명예와 이익을 쫓던 승려들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교종과 선종은 싸움 대신 조화와 화합의 길을 찾아갔어요. 지눌의 수선사는 바로 선교일치 운동의 본고장이 되었고, 고려 불교 개혁의 상징이 되었어요.1210년(희종 6) 지눌은 법당에서 쉰세 살의 나이로 입적하였어요. 지눌의 제자들은 수선사에 탑을 세워 그를 기렸어요. 희종은 그를 추모하여 ‘불일보조’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