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의 힘든 삶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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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고, 그는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었어요. 당시 청계천 주변에는 약 800여 개의 작은 공장이 있었어요.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옷을 만들었지요. 재단사, 미싱사를 비롯해 시다(일하는 사람의 옆에서 그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시다는 대부분 12~15살 어린 소녀들로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올라온 경우가 많았어요. 어린 시다들은 다림질을 하고, 실밥 뜯는 일을 하며 미싱사나 재단사를 도왔지요.
시다부터 시작한 전태일은 얼마 후 미싱사가 되었어요. 월급도 조금 올라 가정 살림에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어요.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어린 노동자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평화시장에 갓 시다로 취직했을 당시 모습(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전태일)
전태일재단
교실 넓이의 약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좁은 작업장에 10여 대가 넘는 재봉틀과 작업대가 놓였어요. 곳곳에 옷과 옷감 더미가 쌓여 있어 제대로 지나다니기 힘들었고, 좁은 공간에 다락방까지 만들어졌지요. 어린 소녀들은 다락방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햇빛도 못 본 채 무려 하루에 14시간 넘게 일을 해야 했어요.
다락방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모습
공장 주인들은 늦게까지 일을 시키기 위해 어린 소녀들에게 잠이 안 오는 약을 먹이기도 했어요. 당시 시다들은 한 달 월급이 3,000원이었는데, 고향집에 돈을 보내고 남는 돈으로 방세 내고 교통비 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어요.
1원짜리 풀빵 하나로 점심을 때우거나 굶기를 밥 먹듯 했어요. 위장병을 달고 살았고 코피를 쏟아가며 일을 해야 했어요. 핏기없는 누런 얼굴에, 피를 토하는 노동자들도 많았어요.
평화시장 건물들은 밖에서 보면 번듯해 보이지만 안은 마치 닭장과도 같았어요. 1960~70년대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은 너무도 어려운 삶을 살아내야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