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

분노하는 백성, 이들을 이끈 홍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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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에서 떨어진 후 홍경래는 10년 동안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당시 많은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떠나 평안도에 있던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광산으로 내몰린 농민들, 평안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사람들, 탐관오리의 횡포에 많은 재산을 빼앗긴 상인들. 이들 마음속에는 세도 정치를 이끌던 안동 김씨 가문과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어요. 이들은 홍경래와 함께 무너져 가는 조선과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뜻을 함께할 것을 맹세했어요.

1809년, 100년 이래 최악의 가뭄이 전국을 덮쳤어요. 그리고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가뭄은 계속 되었어요. 어느 고을은 대부분의 토지가 쓸 모 없게 되어 백성들 모두 굶어 죽을 걱정을 했어요. 한반도 서북쪽의 평안도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죠. 흉년이라고 탐관오리의 횡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나 조정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평안도 백성들을 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드디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래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복동으로 이사를 하였어요. 그런 다음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을 다복동으로 불러 모았죠. 또 주변 고을에 다복동에서 새로 금광을 개발한다고 알려 많은 농민을 모았어요. 다복동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홍경래와 함께 봉기에 참여하였어요.


1811년 12월, 10여 년간 거사를 준비한 홍경래는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봉기군을 향해 크게 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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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하는 홍경래와 평안도민들




“무릇 평안도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 훌륭한 인물이 넘치고 문화와 산업이 번창한 곳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천한 평안도 놈이라 말하며 무시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세도가의 간신배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이제 세상에 널리 알리니 각 고을의 수령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아라. 만약 어리석게도 대항하는 자가 있다면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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