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후 결성된 의열단
컨텐츠 정보
- 3 조회
-
목록
본문
부산 경찰서에서 폭탄을 터트린 사람은 박재혁 의사예요. 박재혁은 의열단원이었고, 부산 경찰서 의거는 의열단의 첫 번째 활동이었어요.
의열단은 1919년 11월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에요. 김원봉은 독립군을 키워내는 신흥 무관 학교에서 폭탄 제조 기술을 배웠어요. 그리고 12명의 동지를 모아 의열단을 만들었어요. 단원 중 절반은 김원봉과 같은 고향인 밀양 출신이었지요.
의열단을 창단하는 김원봉
의열단은 단원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약 10조를 정했어요. 그중 첫 번째는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였어요. 또 일본 고위 관리, 친일파 등 처단할 대상과 조선 총독부와 매일신보사 등 5개 파괴 대상을 정했어요. 의열단의 활동 목표는 1923년 신채호가 쓴 〈조선 혁명 선언〉에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요.
의열단은 1920년 3월 일본인 고위 관리를 암살하고 조선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하기 위해 중국에서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몰래 들여오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 일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많은 의열단원이 체포되었어요.
의열단은 이에 대한 복수로 부산 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했어요. 이 일을 한 사람이 바로 부산 출신의 박재혁 의사예요. 1920년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던 박재혁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연락을 받고 상하이에 갔어요.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동지들의 복수를 하시오.”
김원봉은 박재혁에게 폭탄과 군자금을 주었어요. 박재혁은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들어왔어요. 부산 경찰서장이 평소 고서적(옛날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다음날 고서적상으로 변장하고 부산 경찰서로 갔어요. 일본인 경찰서장이 그가 가져온 책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의열단원의 복수를 하러 왔다며 폭탄을 던졌어요.
폭탄이 터진 후 2명의 경찰관이 그 자리에서 죽고 경찰서장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어요. 박재혁도 폭탄 파편 때문에 오른쪽 무릎을 다치면서 체포되었지요.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있으면서 일제의 법에 따르지 않겠다며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하였고, 결국 9일 뒤에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박재혁 의사 동상(부산 진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 경찰서 폭파 사건은 의열단의 첫 쾌거였어요. 의열단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총 11개의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했어요. 이중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박재혁 의사의 의거처럼 성공한 것도 있고 밀양 폭탄 반입 사건처럼 실패한 것도 있었어요. 지금부터 의열단이 펼친 의거 활동을 자세히 살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