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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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에 결혼하여 오빠와 동생 곁을 떠난 허난설헌은 남편 김성립에게서 사랑 대신 질투와 미움을 받았어요. 시를 잘 짓고 아는 것이 많은 아내가 부담스러웠던 거지요. 또한 그녀의 시어머니도 아들이 며느리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며느리를 구박했어요.
김성립은 집 안에 있기 보다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하루는 김성립이 친구들과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김성립의 친구가 허난설헌을 찾아 왔어요. 또 술집에서 김성립이 놀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허난설헌은 친구 편으로 술과 안주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어요.
“낭군님께서는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래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가.”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각각 한 명씩 두었는데,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자식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이겨냈어요. 또한 시를 짓는 일에 몰두하며 슬픈 마음을 달랬어요.
뿐만 아니라 허난설헌은 세상의 힘들고 외롭게 고통받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시로 나타냈는데, ‘빈녀음(貧女吟, 가난한 여자의 노래)’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에요.
가난한 여자의 노래
얼굴 맵씨는 남들만 못하지 않고
바느질에 길쌈 솜씨 모두 좋건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란 탓으로
중매할미 발을 끊고 몰라라 하네.
춥고 굶주려도 얼굴에 내식치 않고
하루 종일 창가에서 베를 짜나니,
부모님이야 안쓰럽다 여기시지만,
이웃이야 그런 사정 어이 알리요.
밤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짤깍 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
베틀에 짜여 가는 이 비단 한 필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가위로 싹둑싹둑 못 마를 제면
추운 밤에 손끝이 호호 불리네,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이 시는 추운 겨울에 손을 곱아가며 옷을 짓는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허난설헌은 이 시를 통해 가난해서 외롭게 살 수 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지요. 이처럼 허난설헌은 서정적인 시풍으로 외로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어요.
그러던 중 불행이 연이어 그녀에게 찾아왔어요. 1580년 그녀의 나이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관찰사로 일하던 중에 병을 얻어 상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애지중지 기르던 그녀의 딸과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어요. 사랑스런 자식을 하늘나라로 보낸 허난설헌은 다음의 시를 지었어요.
아들딸을 여의고서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소.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의 무덤을 자신이 사는 광릉 땅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만들고 나서 낮은 봉분에 잔디를 심고 어루만졌어요. 훗날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두 아이의 무덤 뒷자리에 묘를 써달라고 했어요.
그녀의 불행은 연이어 찾아왔어요. 임신 중이던 배 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말았어요. 그런데도 남편 김성립은 아내 허난설헌에게 정을 주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녔어요. 허난설헌의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갔어요.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달아 터지면서 그녀를 아프게 했고 힘들게 했어요. 그녀의 어머니가 전라도를 여행하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재능을 끔찍이 아꼈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판하다가 멀리 귀양을 가는 처지가 되었어요.
허봉은 2년 뒤 풀려나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랑 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다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죽고 말았어요. 친정 집안의 연이은 불행을 바라보는 허난설헌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인 억압과 불행했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 시어머니의 학대와 두 자녀를 잃은 슬픔,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등으로 허난설헌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에 빠졌어요. 한번은 그녀 자신의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고 해요.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이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 때였어요.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유언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해요.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 같은 시를 남긴 허난설헌은 얼마 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우게 했어요. 그리고 친정에 있던 자신의 작품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과 함께 1589년 3월 19일 한양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이렇게 시대를 잘못 만난 조선의 천재 여류 시인은 미처 자신의 재능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