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로 돌아와 개혁안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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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무리 당에서 성공해도 부모님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구나. 신라로 돌아가 뜻을 펼쳐야겠다.”
최치원은 고국을 떠난 지 16년 만에 신라 땅으로 돌아왔어요. 다른 유학생들도 신라로 돌아와 활약을 하기도 했지요.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치원을 곁에 두려 했어요. 그는 당에 있을 때 썼던 글들을 정리한 『계원필경』이라는 책을 써 왕에게 바치기도 했지요.
하지만 헌강왕이 죽고, 뒤이어 정강왕과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며 상황이 바뀌었어요. 왕권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진골 귀족들은 권력 다툼을 벌이며 자신들의 배만 채우느라 바빴어요. 왕과 귀족들의 사치스런 생활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요.
백성들은 세금 독촉에 시달리며 나무껍질과 풀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갔지요. 세금을 못내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결국 참다못한 농민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났지요. 그런 틈에 지방에서는 호족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지요.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최치원도 지방으로 쫓겨나고 말았지요.
함양 상림숲(전남 함양군)
최치원은 경남 함양 군수를 지내며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상림이라는 숲을 만들었다.
그는 지방 관리로 쫓겨났지만, 무너져 가는 신라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요. 894년에 10여 가지의 개혁안이 담긴 글을 진성여왕에게 올렸어요.
신 최치원, 충심을 담아 개혁안을 올립니다.
부디 백성들의 삶을 돌보시고 신라를 다시 세우소서.
최치원의 개혁안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졌어요. 진성여왕은 그에게 6두품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인 아찬을 내렸고요.
그렇다면 최치원이 올린 개혁안은 제대로 추진되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6두품 출신이 올린 개혁안을 진골 귀족들이 받아들일 리 없으니 말이에요. 개혁을 하려면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