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 유적

독립군과 의병은 뭐가 다를까?

컨텐츠 정보

본문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무기를 들고 일어나 맞서 싸운 일반 백성들을 의병이라 해요. 외침이 많았던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관군만으로 외적을 물리치지 못할 때 많은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맞서 싸운 경우가 많았어요.


외적과 싸우기 위해 일반 백성이 무기를 들었지만 그 무기는 주로 생활 속에서 구한 것이 대부분이었어요. 가장 많이 사용한 죽창도 주변의 대나무를 구해 만들었고, 낫과 같은 농기구도 의병의 무기가 되었어요.

의병들의 이런 무기는 대한제국 시기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화약무기는 주로 구식 화승총이었고, 대나무로 만든 죽창을 여전히 사용하였어요.



c888d33515da063a792bccac114bb583_1746492115_4555.JPG
의병이 사용한 화승총과 일본군의 소총(전쟁기념관)




대한 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의병에 합류하자 의병의 전투력도 올라갔어요. 그렇지만 의병들에게 신식 소총은 여전히 적었고 대부분 화승총으로 무장을 했어요. 그나마 의병 모두가 무장을 한 경우도 많지 않았어요.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가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제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한 외국인 기자가 의병들을 만났을 때 의병이 한 이야기에요. 비록 옛 화승총과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든 의병이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는 매우 강했어요. 한때는 약 1만여 명의 의병이 모여 일본군이 점령한 한성을 되찾고자 했어요.

하지만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심한 경우 수십 명의 의병이 단 3명의 일본군에게 패해 쫓기는 경우도 있었어요.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 부대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국내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진 애국지사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를 세웠어요. 애국지사들은 무엇보다도 독립군을 키우고 싶었어요.


독립군도 처음에는 의병이나 다름없었어요. 다만 1910년에 국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무력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되찾자는 것을 강조하면서 독립군이라 불리우게 되었어요. 애국지사들은 젊은이들을 독립군으로 기르기 위해 체계적으로 훈련시켰고, 신식 무기로 무장시키고자 했어요.


의지는 강했으나 낡은 무기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의병과 달리 독립군은 강한 군대가 되어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어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더 많은 수의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독립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일제의 침략에 목숨을 바쳐 저항했던 의병들의 뜻은 독립군으로 이어졌어요. 독립군의 뜻은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국군의 뿌리가 되었어요.

변변한 무기 하나 제대로 없던 독립군은 배고픔과 추위를 참아가며 군대를 길러 일본군에 맞서 싸웠어요. 그리고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하였죠. 그것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아시아 최강의 일본군을 상대로 한 독립군의 값진 승리였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늘 앞서나와 이를 극복하고자 했어요. 역사의 여러 장면 속에서 우리 스스로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찾아보아요.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5 / 1 페이지
RSS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