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은 많은 무기를 어떻게 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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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 1천여 명과 전투를 치렀어요. 수가 많은 동학농민군은 단번에 이길 수 있으리라 예상했어요.
그러나 산을 오르는 동학농민군을 일본군의 개틀링 기관총이 막아섰어요.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은 전투가 끝나고 500여 명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 전투로 큰 피해를 입은 동학농민군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어요.
거꾸로 청산리 대첩에서는 일본군이 2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해 독립군을 없애고자 했어요. 이에 맞선 독립군은 2천 명이 넘지 않았어요. 하지만 결과는 독립군의 승리였지요.
동학농민군이나 의병 때와는 달리 독립군은 높은 지형을 이용한 효과적인 작전과 일본군에 뒤지지 않는 무기를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 무기를 만들 수 없었던 독립군은 그 많은 무기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에 망명한 체코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어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가 독립하면서 연해주에 머물던 체코 군단은 무기와 군수 물자를 빨리 처분하고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려고 했어요. 이를 알게 된 독립군은 이들의 무기를 구매하고자 했어요. 식민지를 경험한 체코 군단도 독립군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에 호의적이었어요.
독립군이 사용한 체코 군단의 무기(전쟁기념관)
독립군에게는 무기를 살 군자금이 필요했어요. 간도와 연해주의 동포들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했어요. 돈이 없으면 갖고 있던 금비녀, 금반지, 비단, 심지어 놋쇠 요강까지도 내놓았어요. 동포들이 모아준 군자금으로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총알 등 많은 군수 물자와 무기를 체코 군단으로부터 구입할 수 있었어요.
군자금을 모아 간신히 무기를 샀지만 이것을 운반하는 일도 매우 힘들었어요. 간도의 독립군 부대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200km가 넘는 거리였어요. 독립군 운반대는 어깨에 메거나 양손으로 직접 들고 무기를 날랐어요.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중국 마적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 시간에 깊은 산길을 이용했기에 무기 운반은 더욱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운반해 온 무기를 독립군은 매우 소중히 다뤘어요. 힘들게 구한 체코 군단의 무기는 독립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어요.